8월27일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주님의 이름이 여러분 가운데에서 영광을 받고,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박해와 환난에 대한 인내와 믿음이 심판의 증표>
막스 비어의 소설 ‘행복한 위선자’는 비양심적인 악인 로드 죠오지 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마음뿐 아니라 행동에도 야비함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그의 얼굴만 보아도 사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아름답고 순결한 미어리라는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녀는 “얼굴이 저렇게 무섭게 생긴 사람의 아내가 될 수는 없어”
하고 그를 거절했습니다.
로드 죠오지 헬은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고심한 끝에 세상에서 가장 인자하게 보이는 가면을 쓰고 미어리에게 청혼했습니다.
그녀와 결혼하게 된 그는 날마다 그의 위선을 감추고 참을성 있게 너그럽게 보이려고 힘썼습니다.
좋은 사람같이 보이려고 끊임없이 그의 나쁜 성질을 억눌렀습니다.
어느 날 옛 친구가 사랑하는 아내 앞에서 로드 헬의 가면을 무자비하게 벗겨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가면이 벗겨졌을 때 거기에는 인자한 얼굴 모습이 나타난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피하면서 살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좋은 것일까요?
로드 죠오지 헬이 자신의 성격을 억누르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그의 얼굴모습은 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고통을 주시는 이유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있는 이유는 필요하기 때문이고,
필요하다면 우리는 반드시 고통을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그 고통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를 순결하게 정련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사람은 고통을 멀리하고 싶습니다.
물론 저도 결혼을 할 수 없는 사제가 되고 싶지 않았고, 나이 들어 유학 가서 고생하고 싶지 않았으며, 그것도 모자라 모두가 꺼리는 교구청에서 살고 싶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항상 하고 싶지 않은 것만 시키셨습니다.
왜냐하면 고통 안에서만 내 숨은 모습이 드러나고 그것을 정화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그리스도인들을 칭찬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박해와 환난을 겪으면서도 그 속에서 인내와 믿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이 주님께서 주시는 이유 있는 시련으로 여기고 잘 참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징표”가 된다고 말합니다.
진정 주님께서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만
“하느님 나라의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사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구약의 요셉은 이집트의 재상이 되어 형들과 아버지를 괴롭힙니다.
형들보고 자신의 동생 베냐민을 데려오지 않으면 유다를 이집트의 종으로 삼아버리겠다고 하며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야곱은 베냐민을 내어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사랑한 아내에게서 난 두 아들 중에 요셉이 죽은 줄 알고 있는데,
마지막 남은 베냐민까지 잃게 된다면 자신도 살 수 없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남은 식량도 다 떨어지자 야곱은 베냐민을 내어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자식을 잃어야 한다면 잃어야지 별 수 있겠느냐?”(창세 43,14)
이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괴롭히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끝까지 놓지 못하는 베냐민을 빼앗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은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는데 우리가 하찮은 것을 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고난을 주셔서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텐데’, 혹은 ‘죽으면 죽지 뭐’라는 포기를 받아내고 싶으신 것입니다.
결국 우리 힘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서 우리 힘을 빼앗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래야 당신이 우리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인내와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사람이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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