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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2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08-26 조회수 : 395

8월26일 [연중 제21주일] 
 
복음: 요한 6,60ㄴ-69

<믿음에 ‘결단’이 없으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말씀하시니 그동안 그분을 따라다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이상 그분을 따라다니지 않게 되었다고 나옵니다. 
그만큼 성체성혈의 신비는 머리로 이해하기 어려운 철저한 믿음이 요구됩니다.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사람들은 바로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는 사도들입니다. 
사도들이 성체성혈의 신비를 이해했다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떠나지 않느냐는 말에 베드로는 사도들을 대변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자신들이 찾는 것을 가지신 분은 예수님뿐이시고 예수님이 아니면 다른 갈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갈 곳이 없다는 뜻은 온전히 투신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온전한 투신은 완전한 결단에서 나옵니다.
완전한 결단은 그것 외에 다른 행복은 바라지 않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탈출구를 만들어놓고 상황을 살핍니다. 
양다리를 걸친다 할 수 있습니다. 
제 1 옵션이 실패하면 제 2 옵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차하면 도망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차피 믿으려면 내 온 존재를 투신해서 믿어야지 ‘만약’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투신해서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은 비록 잘못된 믿음을 가진다하더라도 주님께서 바로잡아 주십니다. 
바오로 사도와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처음엔 교회를 박해하는 것이 진리를 위한 길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하느님은 그 열정을 당신을 위해 쓰도록 만드셨습니다.  
 
확신해서 하는 것은 죄가 되더라도 죄가 아닙니다. 
확신 없이 하는 것은 죄가 아니더라도 죄가 됩니다.  
 
확신이 없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결단하지 않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갈 곳이 없는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한 주술사의 말을 믿고 인도에서 스웨덴까지 6,000킬로를 달려간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본래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나 학교에도 다닐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생계를 유지하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림솜씨는 지역신문에 실릴 만큼 좋았습니다.
하지만 어찌 불가촉천민이 사람의 얼굴을 뻔히 쳐다보며 그림을 그리느냐고 괴롭힘이 이만저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가 한 주술사를 만나고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곧 운명의 짝을 만날 것인데, 그녀는 사자자리의 먼 나라에서 올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음악에 조예가 깊고 큰 숲을 소유할 만큼 부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청년 마하난디아는 어이가 없어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며칠 뒤 스웨덴에서 온 사자자리 여학생 샤롯테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피아노 전공의 19살 소녀였고 큰 숲을 가진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마하난디아는 첫 눈에 반해 그녀에게 일부러 초상화를 잘못 그리며 자신을 여러 번 만나러 오도록 했습니다. 
 
매번 초상화를 망치자 샤롯테는 화를 냅니다.
그러자 마하난디아는 주술사의 예언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운명의 여자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밝혔습니다. 
샤롯테도 싫지 않았는지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샤롯테는 여행기간이 끝나자 다시 스웨덴으로 돌아가야 했고 마하난디아는 다시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2년 후 샤롯테를 잊지 못하던 마하난디아는 샤롯테가 보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습니다. 
남은 돈은 낡은 자전거를 한 대 살만한 액수였습니다. 
그는 무려 4달 동안 6,000킬로미터를 밤낮없이 자전거를 타고 샤롯테를 향해 갑니다.  
 
여비는 중간 중간 초상화를 그려주며 충당하였습니다. 
결국 그녀의 집에 도착하여 청혼을 합니다. 
 
둘은 결혼하였고 마하난디아는 정식으로 미술을 배워 세계 유명인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로서도 큰 성공을 거둡니다. 
영국의 BBC에서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 이 둘의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젠 60대가 되었지만 마하난디아는 여전히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녀를 만나야했지만 돈이 없었죠. 그래서 사랑을 위해 페달을 밟았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1975년 그때처럼 지금도 샤롯테를 사랑합니다.”
    
어쩌면 샤롯테가 떠났을 때 마하난디아는 주술사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해 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어차피 인도에 머물면 최하층 계급으로 살아야하기에 희망이 없습니다. 
그는 갈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늦게나마 주술사의 말을 자신의 온 존재를 내어던질 정도로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은 그것을 위해 다른 것을 끊는 노력과 함께 병행돼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바빌론 유배 때 페르시아 왕국으로 정권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첫 왕인 키루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국으로 돌려보내어 성전을 재건하고 그들의 신을 섬기라고 칙령을 내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자신 나라로 돌아가고 싶어 했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 돌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바빌론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차피 거기서도 희망이 없기에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스라엘로 돌아와서는 그들을 음해하는 세력 때문에 성전을 재건하는 노력을 포기하고 각자 자신의 집을 짓는 데만 더 신경을 씁니다. 
 
오늘 복음에서 당신을 떠나는 이들의 미지근함을 질책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영과 육은 서로 반대가 됩니다. 
육체의 만족을 채우면 영적인 만족은 줄어듭니다. 
미지근한 믿음은 세상 욕심과 하느님을 둘 다 추구하려는 데서 생깁니다. 
예수님은 뜨겁거나 찬 것을 좋아하십니다. 
 
만약 마하난디아가 부자이고 상류층계급으로 그 곳에서도 충분히 그림을 그리며 잘 살 수 있었다면 6,000킬로를 자전거로 갈 필요가 있었을까요? 
갈 곳이 없는 것, 그래서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도 어차피 손해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떠나간 이들은 갈 곳이 있었던 것이고, 사도들은 갈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갈 곳이 많은 사람들은 온전히 믿고 사랑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갈 곳이 없는 사람을 ‘가난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 외에 아무 것도 희망할 것이 없는 이들입니다.  
 
세상에선 더 이상 그들에게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행복이 아니시면 다른 어떤 것으로도 만족을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가난한 사람들이어야 하느님을 차지합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당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당신의 살과 피가 아니면 절대 구원에 이를 수 없어서 그것을 위해서는 목숨을 내어놓을 수도 있는 믿음을 찾으십니다. 
 
‘놀러갔다 와서 고해성사 하면 되지’라는 식의 믿음은 이미 절대적인 믿음이 아니라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우리 신앙을 무디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결단이 없으면 어려움이 닥칠 때 그 작은 믿음도 잃을 수 있습니다.  
 
육적인 즐거움을 끊고 영적인 행복만을 추구하는 영웅적인 신앙인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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