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6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오 18,21-19,1
<감사도 키워야 자란다>
어느 여름 한 낮이었습니다.
두 행인이 나무 한 그루 없어 잠시 쉬어갈 그늘이 없는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금방이라도 더위에 쓰러질 것 같은 걸음걸이로 걷고 있었는데 마침 가지가 무성한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합니다.
그 나무아래는 시원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바람까지 솔솔 불어주었습니다.
구세주를 만난 기분으로 그 둘은 나무 아래서 땀을 식히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여보게, 나무란 원래 대부분 어디엔가 쓸모가 있는 법인데 이 오리나무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네.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무가 이 나무라더군.”
그러자 한 사람이 맞장구를 치며 말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쓸모없는 나무구만, 이게.” 둘은 이런 담소를 나누며 그 나무 밑에서 무더위를 피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 한 절대 남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받아도 받은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았다고 느끼면 양심상 내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내어주기 싫어서 받지도 않았다고 느끼고 싶은 것입니다.
내어주고 싶지 않을 때 내 안에서 솟아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감정이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하면 내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무언가를 받았다고 저절로 솟아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아무리 잘 해 봐야 감사하다는 말을 듣기는 불가능합니다.
감사는 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불만족을 죽이는 노력을 했을 때 솟아납니다.
그래서 일부러 불만족의 마음을 죽이고 감사를 끌어올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받으면서도 감사하지 못하게 됩니다.
감사하지 못하게 되면 자비롭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하느님께도 자비를 입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일만 탤런트를 탕감 받은 종은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받지 않아서 감사할 줄 모른 게 아니라 감사하고 싶지 않아서 그 마음을 숨겨두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만나자 그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쳐 넣었습니다.
감사하지 못한 사람은 이웃에게 자비로울 수 없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면 많이 받았음을 깨우쳐 감사의 마음이 솟아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2004년 5월 29일,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들을 기리는 기념비 개막식이 있었습니다.
개막식에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참전 용사들이 초대되었습니다.
많은 이가 인터뷰에 응했으며, 훈장을 받은 사람들도 더러 눈에 띄었습니다.
그런데 명예로운 훈장을 받은 참전 용사들은 한결같이 겸손했습니다.
교만한 태도나 자랑하는 마음, 특별대우를 원하는 눈치는 전혀 없었습니다.
전몰장병들의 이름이 호명될 때 눈물을 터뜨리는 사람은 많았지만, 원망하는 마음을 내비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개막식 축하 행사가 진행되는 4일 내내, 그들은 감사와 겸손만을 드러냈습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1945년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한 직후 “동료들의 피와 친구들의 희생 덕분에 찬사를 받는 사람은 항상 겸손의 미덕을 잃지 말아야 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참전 용사들은 자신들의 곁에서 죽어간 전우들을 회상하며 “저는 영웅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감사는 나무와 같습니다.
작을 때 보살펴주지 않으면 죽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클 때까지 잘 보살펴주면 튼튼히 자라서 가뭄에도 잘 죽지 않습니다.
내 안의 감사도 어느 정도 자라서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을 때까지는 키워놓아야 합니다.
특별히 미사 때 성체성혈을 받아먹고 마시면서 감사를 키울 수 있습니다.
그것 없이는 죄의 용서도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그것이 일만 탈렌트입니다.
성체를 받아먹고 마시며 구원의 보증을 받으면서도 이웃에게 자비롭지 못하고 화를 낸다면 실제로 성체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성체는 감사입니다.
성체가 용서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성체를 영한 것이 아닙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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