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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14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08-14 조회수 : 334

8월14일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독서 : 에제키엘 2,8─3,4
복음 : 마태오 18,1-5.10.12-14

<하느님 앞에 서면 겸손해진다> 
 
며칠 전 밤에 집으로 돌아오다가 집 앞에서 작은 짐승이 튀어나와 급정거를 했지만 결국 그것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처음 해보는 로드킬이라 기분도 좋지 않았지만 한 생명을 의미 없이 죽였다는 것에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차를 뒤로 빼서 가만히 살펴보니 고라니 새끼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온 몸에 부스럼이 났고 털이 다 빠진 불쌍한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죽을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불쌍해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차에게 더 밟히는 일이 없도록 길가에 던져주고 집으로 들어왔는데 어디선가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려왔습니다. 
 
예전에는 짐승의 생명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혐오감을 주는 것들은 없애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동네 아이들과 함께 뱀 일가족 3마리를 몰살시킨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큰 자랑거리였습니다.  
 
물론 그래야 용감하게 보였기 때문에 하긴 했지만 양심의 가책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그렇게 갇혀 있는 뱀을 죽이기보다는 다시 산에 풀어줄 것 같습니다. 
 
요즘은 예전처럼 벌레들도 잘 죽이지 않습니다.
혐오스런 다리가 많이 달린 소위 돈벌레나 나방 같은 것들이 방으로 들어와도 잘 잡아서 창문 밖으로 던져줍니다. 
내가 그 생명 하나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도 지금까지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살아왔음을 반성한 적이 있습니다.  
 
하루살이 하나도 다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생명을 주신 분만이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날파리나 인간이나 다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어린이들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어린이와 과부는 사회에서 인정해주지 않는 부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어린이와 같이 낮아진다는 말은 어린이와 같이 낮은 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뜻과 같음을 말씀하시려 하신 것입니다.  
 
내가 낮아지면 낮은 이들을 잘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물을 받아들이는 곳은 높은 산이 아니라 낮은 계곡입니다. 
자신이 고귀하다고 생각하면 보잘 것 없는 이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목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도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의 양처럼 소중한 존재입니다. 
한 마리의 가치가 구십구 분의 일이 아니라 나머지 구십구 마리만큼이나 소중하단 뜻입니다.  
 
작은 생명 하나도 소중히 여기고 찾아 나설 수 있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가지려면 겸손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한 초보 강도가 어떤 집에 들어가서 누워 있는 집 주인에게 “꼼짝 마, 손들어”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강도가 “왜 손을 안 들어. 죽고 싶어?”라고 협박했더니 
그 사람은 “제가 오십견이어서 손을 들 수가 없네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집 주인의 말을 들은 강도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아, 오십견이세요? 저도 오십견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나았습니다.”라고 말하며 오십견에 대한 정보를 주고는 그냥 가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아파봐야 아픈 사람의 마음을 알고, 내가 작아져 봐야 작은 사람을 품을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입니다.
부모가 먹여주고 재워주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든 처지입니다. 
그런 처지이니 아이들은 자신처럼 불쌍한 이들에 대한 연민이 큽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혼자 힘으로 살 수 있게 되면 자신처럼 자립하지 못하는 이들은 게으르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며 판단합니다. 
 
그러면 다시 어린이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린이가 어린이인 것을 알 때는 부모 앞에서입니다. 
모든 것을 대 해주시는 부모 앞에서 비로소 작아질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 없으면 부모 없는 어린이와 같은 운명입니다. 
주님 앞에서 깊이 고개를 숙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만큼 겸손해질 수 있고 그런 사람이라면 세상 모든 사람을 품에 안을 수 있게 됩니다. 
 
이렇듯 아이가 자신을 낮추는 법을 배우려면 부모 없이는 안 되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기도 안에서 하느님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가야 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환시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보고는 앞으로 고꾸라집니다. 
이는 요한 묵시록의 요한 사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이 모시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는 엎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분 앞에 서야만 우리가 아무런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어린이처럼 될 수 없습니다.
항상 하느님 앞에서 사는 자는 모든 존재하는 것을 포용할 능력을 지닌 자가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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