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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08-03 조회수 : 381

8월3일 [연중 제17간 금요일] 
 
독서 : 예레미야 26,1-9
복음: 마태오 13,54-58

<자신을 믿어버린 수학자의 운명>  

쿠르트 괴델이란 천재 수학자가 있는데 그는 심한 불안증 때문에 스스로를 죽여 버렸습니다.
그의 업적은 어떤 이들의 평가에 의하면 아인슈타인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그는 27살에 수학으로 모든 것이 증명 가능하다는 자신감이 팽배해있는 학자들 앞에서 수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문제들도 있다는 논문을 써서 학계를 뒤집어놓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론에 대한 반발도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를 인정해 주고 지지해준 유일한 인물이 있었으니 미국에 살고 있었던 아인슈타인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초대로 괴델은 미국으로 건너가 그와 오랜 우정을 쌓게 됩니다. 
아인슈타인은 괴델과 함께 이야기 나누는 것을 매우 즐거워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수준이 맞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죽자 괴델은 문을 걸어 잠그고 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사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하고 의심이 많아 불안증에 시달려오고 있었습니다. 
대학 강사를 할 때는 그 자리에서 쫓겨날까봐 두려워했고, 교수가 되어서도 그 명성을 잃을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오직 술집에서 만난 댄서였던 연상의 아내 아델만 믿었습니다. 
그리고 아델이 해 주는 음식만 먹었습니다.
아인슈타인도 천재이기 때문에 타살을 당했다고 믿은 그는 자신도 사람들이 죽이려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아델이 수술을 하여 입원을 하게 되자 그에게 음식을 주는 어떤 이들도 믿지 않았고 병원에 입원해서도 음식 앞에서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괴델은 다른 사람들이 주는 음식 안에는 반드시 독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버티다 결국 아사하고 말았습니다. 
사망 당시 168cm의 키에 몸무게는 고작 29kg에 불과했습니다. 
이 천재 수학자는 수학의 불완전성은 믿었지만 자신의 불완전성은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인간이 완전하다고 믿는다면 누구도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남은 나의 불완전함을 채워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완전하다면 남자를 만날 필요가 없고 남자 역시 여자를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서로를 채워주는 만남 없이는 인류가 지속될 수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로 태어난다면 반드시 서로 간에 부족한 면을 채워주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만남 없이 완전해 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함을 넘어서서 본래 악의 성향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은 우리를 좋은 길로 이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만 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나머지 생각들은 다 악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지혜는 자신 안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누가 적인지 모르면 괴델처럼 결국 스스로를 해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신뢰하지 못하는 나자렛 사람들과 같고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의 예언에 반응하지 않는 유다 백성과 같습니다.  
 
그들이 믿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생각을 너무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을 믿는 이들의 특징은 피해를 보는 것을 두려워한다는데 있습니다. 
자신을 믿어야만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신 안에는 자신을 파괴시키는 악이 숨어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을 믿으면 손해보고 자신을 믿지 않으면 이익을 보게 됩니다. 
 
자신을 믿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기 때처럼 자신에게 사랑을 주는 이를 찾아야합니다. 그러면 실패가 없습니다. 
우리를 초월시켜주는 이는 더 큰 사랑을 지닌 이입니다.  
 
기적을 행해주는데도 그를 믿지 않으려하면 어떻게 악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예레미야도 자신을 믿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신뢰를 두라고 한 것뿐입니다.
자신을 보낸 것이 하느님 사랑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주는 이를 믿으면 실패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내어주는 것보다 큰 사랑은 없습니다. 
당신 아드님을 우리의 양식과 음료로 내어주는 분보다 큰 사랑을 주시는 분은 없습니다. 
그 사랑 앞에서도 자신만을 믿고 입을 닫고 있다면 우리 운명은 안 봐도 뻔합니다.  
 
살려고 하거든 자신을 믿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납시다. 
벗어나는 길은 사랑을 믿는 이에게 신뢰를 둘 줄 아는 겸손함에 있습니다. 
 
‘타인이 주는 사랑이 나를 이용하려는 술책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타인에게 이용당하는 것이 자기에게 이용당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아이들은 누구에게도 이용당할 수 있기 때문에 거의 누구에게도 이용당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잘 보호해주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잘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절대 믿지 않는 겸손함을 보입니다. 
그런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과 이웃에게 보호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큰 낭패를 보지 않습니다.  
 
큰 낭패를 보는 이유는 자신의 생각에서 오는 욕심 때문입니다. 
자신을 버린 이들은 욕심도 없어서 큰 투자도 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믿어서 손해를 봐야 얼마나 큰 손해를 보겠습니까? 
그리고 아이 뒤에는 든든한 부모가 버티고 있습니다.
혹시 속아서 큰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에게 양심의 가책을 남기게 만들어 상대가 회개할 기회를 주게 됩니다.  
 
예수님도 가리옷 유다를 끝까지 믿어주셨고 그의 술책에 손쉽게 당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다에게는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입니다. 
자신과 하느님을 동시에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그저 주님의 뜻에 맡기기 위해 생각을 끊어버린다면 빠르게 자아의 압제에서 
풀려나게 될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십시오.
모든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믿고 속아주십시오. 
그것이 십자가이고 그 십자가의 사랑이 또 많은 이들에게 믿음을 주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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