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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7월 2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07-26 조회수 : 396

7월26일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독서 : 예레미야 2,1-3.7-8.12-13
복음 : 마태오 13,10-17

<​비유 해석의 비밀>
  

락 토마스(Rock Thomas)는 캐나다 농촌에 살던 촌뜨기 꼬맹이였습니다. 
그는 항상 자기 자신을 ‘패배자, 노동자, 애정결핍’으로 정의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떠한 ‘진리’를 알게 되자 인생이 반전됩니다. 
그 진리란 자신을 다시 보는 눈이 되어주었습니다. 
 
어머니는 도망쳤고 아버지는 돈만 가져다쓰는 아이를 비난했습니다. 
14살 때 아버지와 놀자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돈이 땅 파서 나오는 줄 아느냐고 심한 비난을 했습니다.  
 
이후 그는 노동으로 돈을 벌어 17살이 되니 독립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성공의 척도는 돈이었고 그 돈을 버는 방법은 노동이었습니다. 
돈을 버는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패배자, 노동자, 애정결핍으로 자신을 꾸려나갔습니다. 
 
독립한 이후에도 몸이 부서질 정도로 일을 했고 그 덕분에 어느 정도 부유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 엄마로부터 아버지가 암으로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게 됩니다. 
아버지는 입원비도, 세금도 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자신이 모아놓은 돈으로 병원비와 세금을 냈습니다.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올 때 한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돈 때문만이 아니라, 여전히 패배자이자 노동자이며 애정결핍에 묶여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부동산 회사에 취직하여 혼자 야근을 하던 중 지배인이 그를 보고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정말 성실한 친구구만, 이렇게 열심히 일해주어서 고맙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칭찬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지배인은 약간 당황하면서도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혹시 자네 좋아하는 사람 있는가?”
“예? ... 아 예... 한 명 있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요.” 
 
“그렇군, 혹시 존경하는 이유가 있나?”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기 때문이죠.” 
 
“그래? 그렇다면 임무를 주겠네. 
오늘부터 길을 걷거나, 일을 하거나, 밥을 먹을 때마다 ‘나는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라는 말을 500번 반복하게.” 
 
정말 500번이냐고 놀라며 되물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듣게. 인간의 뇌는 언제든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어.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을 끝없이 반복해서 상기시킨다면 자네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다고 해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지.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되고픈 게 아니라 ‘남들이 자신에게 원하는 모습’을 만들기 위해 뇌를 길들인다는 거야.” 
 
한 번도 이런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그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습니다.
가슴이 북받쳐 눈물이 나려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 그는 지역 최고의 부동산 중개인이자 비즈니스맨이 되었습니다.  
 
목표를 이룬 지금은 ‘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을 쉼 없이 반복하며 또 한 번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출처: ‘당신의 인생을 180도 뒤집는 방법’, 체인지 그라운드, 유튜브]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에서 어떤 분이 자신은 흙수저로 태어나서 살아가려고 발버둥치지만 다시 그 나락 속으로 떨어질까 봐 두렵다는 말을 했습니다.  
 
법륜 스님은 당신도 가난하게 살았는데 오히려 그것이 삶의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전에도 굶어 보았으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난했던 것이 장애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도움이 됩니다. 
이 차이는 무엇일까요? 
‘해석의 차이’입니다. 
그 ‘해석의 기준’의 차이가 다른 것입니다.  
 
그 해석의 차이에 따라 어떤 사람은 인생의 경험을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는데 사용하고 어떤 사람은 발전시키는 데 사용합니다.  
 
갑자가 앞이 안 보이게 되면 앞으로 나타나게 될 모든 상황이 두려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필요한 건 볼 수 있는 ‘눈’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비유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비유는 하나의 이야기인데 또 다른 속뜻을 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는 비유로만 말씀하셨고 제자들에게는 이 비유말씀을 해석해 주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비유말씀을 깨닫고 어떤 이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그 비유말씀을 해석해주는 예수님과 함께 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을 품고 있으면 비유말씀의 참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비유를 알아들을 수 있는 ‘눈’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가져야하는 것이 바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진리의 눈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비유를 이해할 수 있으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또한 비유말씀입니다. 
각 사건들마다 무언가 나에게 알려주시려는 하느님의 속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사건 자체에만 연연한다면 이는 그들 자신 안에 진리가 들어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비유는 속뜻이 밝혀졌다면 버려도 됩니다. 
만약 일어난 일에만 연연한다면 뜻은 모르고 비유만 기억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혹은 좋던 나쁘던 모든 일에서 ‘감사’가 우러난다면 그 사람 안에는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일어나게 해 주시는 모든 일은 나를 위한 선물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든지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수없이 되풀이해야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내가 먼저 믿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바꾸어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녀의 눈으로 보는 세상과 인간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완전히 다릅니다.  
 
락 토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부르는지 상관하지 않고, 내가 나를 어떻게 부를지 고민한다면 
그 순간이 바로, 새로운 인생의 시작입니다.”  
 
나 자신을 바로 해석 수 있는 눈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올바로 보고 올바로 해석하게 됩니다. 
그래서 점점 더 많은 진리로 자신을 발전시킵니다. 
그렇게 가진 자는 점점 더 가지게 됩니다.  
 
비유를 들어도 그 뜻을 해석할 능력이 없으면 허사인 것처럼, 세상을 살아도 그 안에서 보물을 찾아낼 눈이 없으면 영원히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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