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9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오 11,28-30
<엄마가 배고프면 자녀도 먹는다>
한 어린 소년이 학교에서 편지 한 장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편지가 우리의 삶까지도 바꿔놓을 줄 몰랐습니다.
아이는 선생님이 편지를 줬다며 엄마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잠시 뒤,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큰 소리로 편지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천재입니다.
이 학교는 그를 가르치기에 너무 작은 학교이며 좋은 선생님도 없습니다.
당신이 아이를 가르쳐주시길 바랍니다.”
엄마는 병에 걸려 죽는 순간까지 선생님의 말을 따랐습니다.
엄마가 떠난 지 수년이 지나, 아들은 유명한 발명가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들은 엄마의 유품들을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선생님이 엄마에게 보냈던 그 편지도 있었습니다.
그는 편지를 펼쳐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저능아입니다.
이 아이를 다른 아이들과 함께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아도 됩니다.”
그는 편지를 읽고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다이어리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저능아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그를 이 시대의 천재로 만들었다.”
[출처: ‘엄마 보여주라고 선생님이 준 편지’, 포크포크, 유튜브]
공부를 강요하여 아이가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에디슨의 어머니는 무언가 달랐습니다.
아기를 낳았다고 자녀를 낳은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는 아기가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 출산합니다.
아이는 계속 태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엄마는 건강하게만 태어나기를 바라지 공부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그것을 망각하고 아이에게 이것저것을 바라게 되기도 합니다.
아기는 엄마를 먹으며 태어나고 자라지만 가끔가다가 엄마가 아기를 먹는 수도 있습니다.
잔인하게 들릴 수 있어도 그렇습니다.
북극의 어미 곰이 너무 배가고파 아기를 먹고 그 머리만 물고 걷는 사진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딱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자녀를 먹이는 어머니가 있는가 하면 자식을 먹는 어머니도 있습니다.
에디슨의 어머니는 아이가 가지고 온 편지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배고픈 엄마였다면 아이를 혼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디슨의 어머니는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주는 것만을 바랐습니다.
배가고픈 엄마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자녀를 먹는 어머니가 되는 이유는 자신이 먹히지 말아야 할 것에 먹히기 때문입니다.
해님과 달님 동화에 보면 떡을 파는 어머니가 나옵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겠다는 호랑이도 나옵니다.
결국 줄 떡이 없어지자 엄마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게 됩니다.
그리고 엄마의 옷을 입은 호랑이가 자녀들 앞에 나타나게 됩니다.
엄마가 그런 상태가 되었다면 그 엄마는 자녀를 잡아먹습니다.
호랑이는 엄마의 자아입니다.
자아는 항상 배가 고픕니다.
그 배가 채워지지 않으면 자신의 주인까지 잡아먹습니다.
자아가 힘을 못 쓰게 하는 방법은 그놈이 배고프지 않도록 계속 떡을 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떡은 한계가 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그 떡이 주어지지 않으면 엄마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게 됩니다.
우리 안의 자아를 죽이는 그 떡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입니다.
우리 또한 하느님께서 주시는 떡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자아는 하느님의 피로 죽습니다.
하느님의 피는 사랑이고 성령입니다.
하느님의 희생으로 죽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계속 이 떡을 받아야 자신 안에 있는 호랑이를 잠재울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도하지 않는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 안의 호랑이에게 먹혀 결국 자녀를 먹는 어머니로 돌변하게 됩니다.
호랑이로 돌변하면 자아의 배고픔을 자녀를 이용해 채우려합니다.
그러면 자녀는 어머니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배고픈 어머니를 보고 끊임없이 도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나무 위에 오르고 그것도 안 되면 동아줄을 타고 하늘로 갑니다.
어머니는 썩은 동아줄을 잡고는 자녀들을 쫓아갈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는 너희들에게 해 준 게 얼만데 나한테 이러느냐며 눈물을 흘립니다.
어머니가 배고픈 호랑이가 되면 그 밑에서는 좋은 자녀가 탄생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자녀를 낳는 것과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자녀를 낳는 여인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섭니다.
“임신한 여인이 해산할 때가 닥쳐와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소리 지르듯 주님, 저희도 당신 앞에서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온전한 자녀를 낳을 수는 없었습니다.
“저희가 임신하여 몸부림치며 해산하였지만 나온 것은 바람뿐.
저희는 이 땅에 구원을 이루지도 못하고 누리의 주민들을 출산하지도 못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누군가를 출산하려면 땅에 이슬이 내리듯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 당신의 이슬은 빛의 이슬이기에 땅은 그림자들을 다시 살려 출산하리다.”
‘빛의 이슬’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은총입니다.
이 은총의 물 없이 자녀가 탄생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자아를 죽이는 떡인 것입니다.
이 떡으로 자아가 죽으면 참 자녀를 출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떡을 받아 자아를 통제해야 이웃을 잡아먹는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참된 친교를 이루기 위해서 먼저 내가 호랑이에게 먹히지 않도록 자아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떡을 충분히 채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떡으로 자아도 죽이고 자녀도 먹여야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자신의 자아도 죽이고 이웃의 자아도 죽입니다.
자아를 죽이면 새로 태어납니다.
그렇게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을 회개라 합니다.
이 탄생을 이루어나가는 것이 친교입니다.
그러니 참된 친교가 새로운 그리스도인을 만들어내는 선교가 되는 것입니다.
자녀를 먹는 어머니가 아닌 낳는 어머니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이웃을 이용하는 사람이 아닌 이웃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려면 내 안의 기름이자 떡이자 은총인 성령님을 항상 풍부하게 지닐 수 있도록
규칙적인 기도생활이 절실히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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