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5일 [연중 제15주일]
복음: 마르코 6,7-13
<자기가 가진 것을 주는 자, 자기를 주는 자>
1976년 구소련 예례반 댐에서 전차 추락사고가 있었습니다.
승객을 태운 전차가 기계고장으로 10m아래 물속으로 곤두박질 쳤고 총 92명 중 30명이 구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30명을 구한 것은 구조대가 아닌 수영 천재로 불리던 한 남자, 샤바르시 카라페트얀이었습니다
샤바르시 카라페트얀은 세계 수영 선수권 첫 출전부터 세계 신기록을 갈아치웠고 그 후 3년간 각종 대회에서 신기록만 11개를 세워 이젠 올림픽 금메달만 목전에 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예레반 댐을 달리며 훈련을 하던 도중 전차가 추락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구조대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 없어 바로 물로 뛰어들었지만 물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상황이었습니다.
손으로 짚으며 전차 안의 사람들을 빼내어 몇 명 정도 구조했을 때 구조대가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조대는 물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조대가 가져온 산소통이 모두 비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자 카라페트얀은 다시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온 몸이 유리에 찢겨가며 30명을 혼자서 구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승객을 구조하며 입은 상처와 탈진 때문에 46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다행히 깨어나긴 했지만 의사는 패혈증이 심해 더 이상 수영은 무리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몸을 회복해 수영에 재도전 해봤지만 이전의 기록이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잊혀져갔습니다.
왜냐하면 정부에서 그가 사람들을 구조한 것을 숨겼기 때문입니다.
여론을 의식하여 구조대가 30명을 구조한 것으로 발표를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담당했던 검사가 양심선언을 한 까닭에 이 사실이 밝혀졌고 몇 년 후 그는 국민 영웅으로 추대 받게 됩니다.
[출처: ‘구소련의 영웅 샤바르시카라페트얀’, 서프라이즈]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가진 것을 주고 어떤 사람은 자신을 줍니다.
카라페트얀은 자신을 줄 준비가 되어있었던 사람이고 구조대원들은 가진 것을 줄 준비가 되어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 모두가 사랑이기는 마찬가지지만 그 깊이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 살과 피를 주십니다.
당신 가진 것을 다 주신 것도 모자라 자신을 온전해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 제자들도 당신처럼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미 가진 게 많은 사람들은 가진 것을 주면서 충분히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서는 가진 것이 다 떨어져야합니다.
카라페트얀은 가진 것이 없고 몸만 있었기 때문에 바로 물로 뛰어들 수 있었습니다.
가진 것만을 주려는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이나 꼭 필요한 무언가에 피해가 온다면 곧 내어주는 것을 멈추게 됩니다.
하지만 가진 것이 없는데도 사랑이 있다면 자신을 내어주게 됩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생명을 내어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건강을 먼저 생각한다면 자신을 내어줄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제자들이 가진 것은 오로지 악령을 쫓아낼 수 있는 성령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바로 내어놓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가난해야합니다.
사랑의 더 깊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부자가 당신을 따르려고 할 때 가진 것을 먼저 다 팔고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돈만 나누어주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정도라면 당신 제자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제이면서도 가진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 줄 수 있는 만큼만 주며 먼저 ‘건강’을 챙깁니다.
건강이 나빠질 것 같으면 무리하지 않습니다.
아직까지는 제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단계에까지는 가지 못한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피해입지 않는 사랑은 아직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지금 제주도에는 예멘 난민 500여명이 난민 심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럽 많은 나라들은 난민들을 받아들여 사회문제가 야기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난민들이 저지르는 범죄가 적지 않은 실정입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우리나라 국민 중 많은 이들은 난민을 받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을 내어놓고 있습니다.
국민안전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자세는 줄 수 있는 것은 주겠지만 우리 자신은 주지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물론 가진 것을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하지만 내 자신을 내어줄 수 없으면 참다운 사랑은 아닙니다.
과연 유럽사회가 난민 때문에 더 병들어갈까요,
아니면 인종차별적 이기주의나 물질만능주의 때문에 더 병들어갈까요?
상처 하나도 받지 않으면서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려면 자신의 피해를 감수해야만 합니다.
전재용 선장은 베트남 난민 96명을 구해주고 큰 원양어선의 선장에서 통통배를 타며 멍게를 걷어 올리는 삶을 살아야했습니다.
내가 손해 보아야 참 사랑입니다.
1997년 콜롬비아 시골마을 산토나의 파블로라는 한 젊은이가 군대에 입대합니다.
그런데 그는 반군에게 잡혀 인질이 됩니다.
반군은 이 군인들의 목숨 값으로 정부에 자신들의 포로들을 석방하라고 합니다.
군 복무하다 그렇게 된 것이니 아들을 살려달라는 아버지의 청원에도 정부는 반군과의 타협은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파블로의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고 거리로 나가 200만 명의 서명을 받아냅니다.
하지만 역시 나라에서는 원칙을 바꿀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합니다.
그렇게 10년이 흐르고 모두 아들을 포기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연히 반군이 정부에 보내는 메시지에 아들이 생존해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는 아들만 포로가 되어 고생하게 할 수 없다며 자신도 쇠사슬로 손을 묶고 산토나에서 보고타까지 1,200km가 되는 길을 46일 동안 걷습니다.
이 이야기가 매스컴을 타자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이 행진에 동참했고 보고타 입성 때는 수많은 인파가 그를 맞아주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여정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후에도 아들의 석방을 외치며 베네수엘라, 에콰도르를 비롯해 프랑스, 스페인, 독일까지 행군을 계속했고, 바티칸에 이르러 베네딕도 16세 교황을 만나 위로를 받습니다.
이렇게 국제 여론이 뒤끓고 교황청까지도 가세하자 콜롬비아 정부도 파블로의 석방을 두고 반군과 협상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기나긴 협상 끝에 2010년 파블로는 아버지 곁으로 올 수 있게 되었고 그가 직접 아버지 팔에 감겨있는 쇠사슬을 풀어주었습니다.
줄 것이 하나도 없을 때 비로소 참으로 줄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가진 것을 주는 것도 좋지만 자신을 주어야 참 사랑입니다.
자신 안에는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자신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을 때 하느님을 선물할 수 있습니다.
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머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하겠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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