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신부에게 큰 고민이 있었습니다. 강론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강론에 신자들은 졸거나 딴 짓 하기 일쑤였습니다. 무관심한 신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도 관심을 끌 수 있는 강론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교님을 찾아가 이 고민을 말씀드렸습니다. 주교님께서 이렇게 하면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어젯밤 좋은 여인의 따뜻한 품에 안겼어요.’라고 말하면, 신자들에게 큰 관심을 끌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얼마나 나를 잘 받아줬는지 말씀하세요. 마지막에 ‘그분은 바로 나의 어머니입니다.’라고 말하면, 신자들은 신부님 강론에 큰 감명을 받을 것입니다.”
다음 주일, 젊은 신부는 긴장하면서 강론대에 섰습니다. 그런데 강론대에 서는 순간, 준비된 강론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 것입니다. 더듬거리면서 생각나는 대로 말했습니다.
“어젯밤, 나는…. 나는 뜨거운 여인의 따뜻한 포옹을 받았어요.”
이 말만 하고, 그 뒤의 말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여인이 누구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 여인을 추천해 주신 분은 우리 주교님이십니다.”
강론이 잘 되었을까요? 주교님은 아주 이상한 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주님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주님을 이상한 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특히 사랑보다 욕심과 이기심이 앞서면 주님을 믿는 우리의 모습에서 주님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이상한 주님이 되고 맙니다.
실제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이상한 분으로 만들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당신 신원에 관해 직접 말씀해 주셨지만, 바리사이들은 그분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의심합니다. 그 의심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했고, 따라서 하느님 아버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자기들은 올바르고 전혀 거짓이 없다고 생각했고, 예수님은 거짓말쟁이로 몰면서 이상한 분으로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선포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세상의 빛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으로 사랑에 반대되는 삶이 아닌, 가득 찬 사랑으로 세상을 환하게 비출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하면서 기쁨과 행복의 삶을 지금 살 수 있게 됩니다. 우리를 사랑으로 이끄시는 주님을 이상한 분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명언: 지혜는 바깥이 아닌 우리의 내면에서 생긴다. 단순히 정보를 얻는 것과 앎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요한 크라우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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