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7,1-2.10.25-30
타협하는 신앙은 매력이 없다, 그래서 희망도 없다
예수님께서 초막절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을 때 몇몇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동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만큼 세상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본인들도 그 믿음을 계속 유지하기 힘이 듭니다.
일본은 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의 선교로 천주교 신앙이 급속히 전파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그리스도교 금교령이 내려지면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하고 극심한 박해를 겪었습니다.
박해의 공포 앞에서 일부 신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여 신앙을 숨긴 채 잠복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을 ‘가쿠레 기리시탄(잠복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박해를 피해 숨은 신자들은 겉으로는 불교나 신토(神道)의 신앙을 따르는 척 하면서,
내부적으로는 천주교 신앙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들의 신앙은 원래의
가톨릭 교리와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마리아 관음(マリア観音)’상입니다.
원래의 성모 마리아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당국에 적발되어 처형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성모 마리아를 일본식 불상인 관음보살(観音菩薩)과 비슷하게 만들어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본래의 성모 마리아 신심은 점점 희미해지고, 마리아 관음상은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아닌 일본 토착 종교의 신적인 존재로 인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박해를 피하기 위해 기도문과 성가도 일본 토착 종교적 표현으로 은밀히 바꾸고 위장하게 되었습니다.
미사 전례도 점차 원형을 잃어버렸으며, 성사의 정확한 의미와 방법 또한 잊혀졌습니다.
이러한 변형은 수 세대에 걸쳐 지속되었고, 19세기 중반 일본이 개항하고 천주교 선교사들이 재입국했을 때, 많은 잠복 기리시탄들은 이미 정통 천주교와는 전혀 다른 신앙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가쿠레 기리시탄들은 오랜 세월 박해 속에서 죽음을 피하려는 두려움으로 인해 정통 신앙을 잃고, 그들만의 왜곡된 신앙 체계를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 혹독하고 오랜 박해에도 신앙을 지켜온 것은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의 가톨릭교회는 거의 죽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역사를 기억하며, 신앙을 보존하고 전하는 일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줍니다.
죽음을 피하고자 했던 가쿠레 기리시탄의 역사는 결과적으로, 두려움이 신앙을 왜곡하고 궁극적으로는 신앙의 쇠퇴와 소멸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 가톨릭 신앙은 일본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민족성 자체가 밟으면 더 기를 쓰고 일어나는 민족성이 우리나라입니다.
한국의 천주교회는 18세기 말, 외국 선교사가 아닌 한국인 학자들 스스로 진리를 찾아 받아들인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형태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독특한 출발은 초기에 사제가 없다는 치명적 약점을 가졌습니다.
초기에는 임시로 평신도가 성직자의 역할을 대신하는 ‘가성직(假聖職) 제도’를 만들어 교회의 모습을 갖추려 했으나 이것이 정통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고는 반드시 교회의 공식 절차를 통해 안수를 받은 정통 사제들을 목숨을 걸고 영입하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습니다.
또한 초기 한국 천주교회는 당시 조선 사회에서 일반적이었던 유교의 조상 제사나 불교적 요소와 결합하는 방식을 철저히 거부하고, 오직 교황청의 지침에 따라 정통적인 신앙만을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필연적으로 당시 조선 사회의 전통적인 관습과 충돌을 빚게 되었고, 이는 곧 박해로 이어졌습니다.
이들의 죽음은 오히려 신자들에게 더욱 굳은 신앙을 불러일으켰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는 신앙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순교 정신은 또한 정통 사제를 초빙하는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신자들은 중국 베이징 교구에 여러 차례 대표단을 파견하여 사제 파견을 요청했습니다.
그 결과, 1795년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최초로 한국에 입국하여 성사를 집전하고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후에도 사제의 영입운동은 계속되어, 마침내 1836년 파리외방전교회의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 등이 조선 땅에 들어와 비로소 한국 천주교는 본격적인 성직 중심의 정통적인 교회 체계를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비록 가성직제도와 같은 불완전한 모습으로 시작되었지만,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왔을 때는 거의 로마보다 더 로마다운 보편 교회가 요구하는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이 형태는 목숨을 걸고 지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켜내는 이들에게 많은 열매를 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체를 영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것을 믿는 사람 손 들어보라고 하면 신자 중의 몇 프로나 들까요? 거의 들지 않습니다.
조선시대는 성체 한번, 고해성사 한 번 하려 목숨을 걸었었습니다.
신앙은 죽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신앙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세상과 타협하고
변질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 신앙은 더는 매력을 지니지 못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가톨릭 신앙은 어떻습니까? 세상과 타협하기 위해 지옥도 없다고 하고, 성체를 왜 영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십일조도 더는 이야기하지 않고, 삼위일체 교리까지도 쉬운 방식으로 변질시켜 설명합니다.
사랑도 제 목숨을 지키려 하는 타협적인 모습을 보일 때는 믿을 수 없는 게 되어버립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왜 지금도 매력적입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숨에 관계된 것입니다.
성 라우렌시오나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 초대교회의 성인인 폴리카르포 주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타협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수많은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과 믿음을 주었습니다.
종교나 사랑이나 다 목숨을 내어주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매력을 잃는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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