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지 못하는 건 증거가 없어서 가 아니다
어제 심판이나 판단, 평가는 생존과 관계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평가에서 자유롭고 사적 감정이 들어가지 않은 평가를 하려면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간 사람이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평가를 위한 ‘증거’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무언가를 평가하려면 증거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젊을 때는 판단해야 하는 게 많았던 것 같습니다. 대학이나, 직장, 혹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결단은 인생을 좌우할 수 있기에 신중하게 고민합니다.
그러나 그 신중한 만큼 만족스럽지는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나의 배우자를 선택하기를 정말 잘하셨습니까? 고해성사 때 들어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분명 증거를 꼼꼼히 살펴보고 판단을 했을 텐데 왜 결국엔 배우자를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요?
분명 눈에 보이는 증거들을 무시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에서 개츠비는 데이지 부캐넌이라는 여인을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모든 삶을 그녀를 다시 얻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버립니다.
그의 사랑은 위대합니다.
그런데 정말 위대할까요? 그는 믿지 말아야 하는 증거들을 무시했기에 비극을 맞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이 개츠비는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젊은 시절 군인이었을 때 데이지를 만났습니다.
하지만 신분 차이로 인해 그녀와 결혼할 수 없었고, 전쟁 후 돌아왔을 때 데이지는 이미
부유한 톰 부캐넌과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개츠비는 그녀를 포기하지 않고, 다시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막대한 부를 쌓고 호화로운 저택에서 밤마다 파티를 엽니다.
개츠비의 이웃이자 이야기의 화자인 닉 캐러웨이는 그를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믿고 있었습니다. 데이지가 톰을 떠날 거라고. 오로지 사랑만으로 세월을 되돌릴 수 있다고.”
마침내 개츠비는 닉의 도움으로 데이지와 다시 재회하게 됩니다.
데이지는 처음엔 개츠비를 잘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결국 처음의 어색함을 지나, 두 사람은 다시 감정을 나누게 되지만, 개츠비는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데이지”를 되돌리려 합니다.
그는 닉에게 단호히 말합니다.
“그녀는 톰을 사랑한 적 없어.
단 한 번도. 그건 사실이 아니야.
그녀는 언제나 나만을 사랑했어.” 그러나 데이지는 진실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며, 끝내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나는… 나는 그땐 톰도 사랑했어.”
개츠비는 돈 때문에 자신을 떠났던 것, 자신을 잘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 톰을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있다는 것 등의 증거들을 무시합니다. 자신의 사랑만 완전하면 된다고 여깁니다.
결정적인 장면은 데이지가 몰던 차로 인해 마틀드 윌슨이라는 여자가 죽게 되고, 그 사건의 책임을 개츠비가 대신 지게 되면서 벌어집니다.
그는 데이지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합니다.
하지만 데이지는 아무 말도 없이 톰과 함께 집을 떠나버리고, 개츠비는 그녀의 전화만을 기다립니다.
닉은 그런 개츠비를 보며 말합니다:
“그는 아직도 전화가 올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 여자가 그를 구해줄 거라고.” 하지만 전화는 오지 않았고, 대신 마틀드의 남편인 조지 윌슨이 찾아와 개츠비를 총으로 쏘고 자신도 자살함으로써 이야기는 비극적으로 끝이 납니다.
개츠비는 끝까지 데이지를 믿었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사랑에 감동하고, 자신과 함께 해 주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데이지는 자신의 안위와 사회적 지위, 안정된 가정을 포기하지 않았고, 개츠비가 모든 것을 걸고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에게 그저 ‘잠시의 기억’에 불과했습니다.
닉은 결국 개츠비의 장례식에 참석한 유일한 친구가 되었고, 그를 이렇게 평합니다:
“개츠비는 위대했다.
그가 그토록 순수하게 꿈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 꿈이 현실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개츠비는 사실 데이지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 것뿐’입니다.
데이지를 사랑하는 것도 결국 그 마음의 심연에는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수많은 증언과 증거에도 당신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마치 나폴레옹처럼 자기 자신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대부분이라 해도 될 것입니다. 자기에게 영광을 주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옳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옳음을 증명해가는 삶을 삽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 자신은 ‘뱀’으로 표현됩니다.
뱀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다니 될 말입니까?
겸손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뱀이 하는 수많은 잘못된 판단을 통해 배워나가야 합니다.
어차피 인간은 옳을 수 없다는 것을.
증거를 통해 올바로 판단하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아이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주장합니까? 아이에게 진리는 부모입니다.
부모가 옳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시키는 일은 잘 따라 합니다. 그래서 아이는 쉽게 믿습니다.
그리고 올바로 믿습니다.
아이들이 어른을 잠깐 보고 판단할 때 그 판단은 틀리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는 생각이 굳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될수록 교만해지니 문제입니다.
진정한 성장은 자기 자신이 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어린이가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자기를 믿지 않게 되는 과정입니다.
믿음은 증거의 문제가 아닙니다.
겸손의 문제입니다.
겸손해지면 증거가 보이고, 교만하면 증거를 무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린이처럼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자기 머리에 왕관을 씌우지 않고 부모의 머리에 씌웁니다.
그렇게 증거들을 통해 객관적으로 믿음으로 쉽게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증거가 많아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믿는다는 것은 증거를 주는 이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따라서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자는 믿지 못합니다.
내가 뱀임을 믿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수많은 증거들을 통해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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