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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3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03-31 조회수 : 124

내가 누군지 알아야 있어야 할 곳이 보인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언자는 당신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나자렛을 떠나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카나라는 동네로 가십니다.

그 동네에서 카파르나움에서 온 왕실 관리를 만납니다.

그의 아이가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자렛에서의 실망 때문인지,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라며 부정적인 표현을 하십니다.

그러나 왕실 관리는 계속 졸랐고 예수님은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마주 와서 아이가 살아났다고 말하였는데, 그 종들에게 아이가 살아난 시간을 묻자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하고 말씀하신 시간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나자렛이라는 동네를 떠나시어 당신에 첫 번째 표징을 일으키신 카나로 오셨습니다.

여기에서 또 두 번째 표징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는 마치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어디에 머물러야 할지 모르면 결국 자신과 이웃의 파멸을 불러옵니다.

영화 ‘피츠카랄도(Fitzcarraldo)’는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의 1982년 작품으로, 한 남자의 어리석고 집착적인 꿈이 어떻게 그의 인생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그린 작품입니다.  

 

주인공인 피츠카랄도는 아마존 정글 한복판에 오페라 하우스를 건설하려는 불가능한 꿈을 꾸는 남자입니다.

그는 부유한 사업가로서 오페라의 열렬한 팬이며,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과 문화에 대한 열정이 매우 강합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꿈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며, 그로 인해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피츠카랄도는 아마존 강을 따라 오페라 하우스를 건설하기 위해 대규모 투자를 하게 되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방법은 점점 더 무모한 선택들을 포함하게 됩니다.

그는 오페라 하우스를 지을 자원을 얻기 위해, 정글을 가로지르는 길을 개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세운 계획은 두 개의 증기선을 아마존의 두 강을 잇는 산을 넘어 끌고 가는 것입니다.

산을 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산 중턱을 넘는 과정에서 그가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무모한 꿈에 집착했는지가 극명히 드러납니다. 

 

피츠카랄도의 계획은 점점 더 위험하고 극단적인 상황을 초래하며, 이를 위해 현지 원주민들과

협력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고, 그는 결국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을 위험에

빠뜨리게 됩니다.

그의 집착은 결국 사람들의 희생을 초래하고, 자신이 이룬 것이라곤 모든 것을 잃은 채 끝내게 되는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머물 곳을 아셨습니다.

저는 더 젊었을 때는 저를 싫어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싫은 사람이 거의 없고 모두에게 잘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친구를 위해 에너지의 99%를 쏟고 1%만 다른 이들에게 쏟았습니다.

그랬더니 결과는 어땠을까요? 똑같았습니다.

저를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고 저를 싫어한 사람은 제가 목숨을 바쳐도 싫어할 것임을 알았습니다.

다만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쏟아주었어야 할 에너지를 그 사람에게 다 소진한 것이 아깝게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이런 경우를 많이 겪습니다. 에너지도 시간도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득이 나지 않는 곳에 투자한다면 어리석습니다.

사막에 씨를 뿌리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열매를 내는 곳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에 믿음의 씨를 뿌리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라는지 관찰하십니다.  

 

나자렛이라는 동네는 처음부터 그들의 교만으로 그 씨가 싹이 트고 자라나 열매를 맺기를 허락하지 않는 동네였습니다.

구약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이끄실 때 에돔과 모압, 그리고 암몬은 싸움을 걸지 말고 아모리 족속과는 싸워서 그 땅을 차지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머물 수 있는 땅을 지정해 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당신이 어디 머무셔야 하심을 아셨습니다.

당신에 대한 믿음의 열매가 맺히는 곳에 머물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한 번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선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온 마을이 당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마을을 떠나 다른 마을로 가기로 결심하십니다.

이미 열매가 맺혔기 때문입니다.

열매가 맺혔는데 농부가 계속 일할 필요는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어디에 머무실 줄 아셨습니다.

당신을 환영하는 믿음이 성장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풍성히 맺혔다면 다른 곳으로 옮기셨습니다.

우리의 머묾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나를 환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머물러 봐야 에너지 낭비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곳을 고집하다가는 그들처럼 자신도 말라버립니다. 

 

좋은 땅이 되지 않았는데, 계속 그 땅에 귀한 씨를 뿌리는 것은 어리석은 낭비입니다.

좋은 땅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믿음의 열매가 맺히는 땅이 내가 머물러야 할 땅입니다.

그것을 통해 나도 보람이 있고 열매로 가득한 에덴에 머물게 되기 때문입니다.

에덴이 아닌 곳에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치 동산을 가꾸는 동산지기와 같습니다. 아직 내가 뿌린 씨의 열매를 맺을 땅이 아니거든 그 땅이 비옥한 땅이 될 때까지 그 시간에 열매를 맺어줄 다른 땅으로 이동하여 일해야 합니다. 우리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그 땅이 ‘신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에게 나자렛 땅이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대사제들은 좋은 땅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시간 낭비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을 받아들이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우리가 성체성사로 하느님이 될 수 있다고 말하였을 때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아주 잘 받아들이시고, 지금도 그 숫자가 점점 늘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있어야 할 자리가 사제들 속이라기보다는 신자들 속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안에서 분명 더 행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들 속이 많은 열매가 맺히는 에덴동산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농부들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면 이 세상에서부터 에덴동산 안에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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