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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2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03-23 조회수 : 105

회개로 가지게 되는 열매: 사람들과 섞이는 게 힘들다면? 

 

 

‘회개’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종종 단순하게 죄에서 돌아서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회개는 단순히 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세상과의 관계를 깊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회개에 대해 말씀하시며 포도밭에 심어진 무화과나무 한 그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한 그루는 회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 열매가 있어야 다른 포도나무들과 섞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해 ‘거름’을 한 해 더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거름으로 우리 안에 사람들과 섞이게 만드는 열매는 무엇일까요?

체코 단편영화 ‘다리’(Most)의 줄거리입니다. 영화의 무대는 체코의 한적한 강가 주변입니다.

주인공인 아버지는 강 위로 지나는 기차가 안전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도록, 다리를 들어 올리고 내리는 일을 하는 교량 관리원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아내와 헤어져 홀로 아들을 키우고 있고, 아들에 대한 사랑은 각별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기어 장치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언제 다리를 들어올려야 하고 언제 내려야 하는지를 상세히 알려줍니다.

둘은 함께 점심도 먹고, 때로는 관리실 밖으로 나가 강가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시각, 기차 안에는 여러 승객이 타고 있는데, 그중에는 마약에 중독된 한 여성이 있습니다.

그녀는 아직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지만, 삶에 지쳐 보이고 눈빛이 불안정합니다.

인생에 낙이 없는 듯, 우울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 뿐, 주변 사람들과 대화도 없습니다.

그녀가 탄 기차는 빨간 불 신호를 무시하고 배가 통과하게 하려고 들어 올린 다리를 향해 돌진합니다.

이런 상태라면 기차에 탄 사람은 모두 죽습니다. 아버지는 다른 일을 보고 있고, 이에 아들은 수동으로 다리를 내리려 다리로 올라갑니다.  

 

그 순간, 관리실 창밖을 내다보던 아버지는 아들이 다리 하부 기어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더 큰 문제는 아들이 실수로 발을 헛디뎌 기어 장치 틈새에 끼인 듯 보인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순식간에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만약 지금 레버를 내려 다리를 닫는다면 기차는 구출될 것이지만, 아들은 기어에 깔려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들을 살리기 위해 다리를 올린 채 둔다면, 기차는 강으로 추락해 승객 전원이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치열한 번뇌 속에서 아버지는 레버를 잡고 손을 떨며

주저합니다.

하지만 결국 수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레버를 힘껏 내리며, 다리를 닫습니다.

굉음과 함께 기어 장치가 돌아가며 다리가 내려오는 순간, 아들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창을 통해 아들이 끼어버리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무너집니다.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고개를 떨구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의 희생 속에 다리가 정상적으로 내려지고, 기차는 안전하게 지나가 버립니다. 

 

아버지는 관리실 창문을 붙잡고 창백한 얼굴로 기차가 지나가는 광경을 바라봅니다.

승객들은 자신들이 구조된 사실도, 열차가 위험했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웃고 떠들며 일상으로 향해 갑니다.

누군가는 신문을 보고 있고, 누군가는 이어폰을 꽂은 채 잠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던 마약 중독 여성은 잠시 창밖을 보다가, 아버지와 눈이 마주칩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비통한 얼굴과 절규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 일어났다는 예감에, 그녀는 순간 두려움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기차는 이미 속도를 내어 곧 시야에서 사라지고, 아버지는 통곡에 가까운 울음을 터뜨리며 쓰러집니다. 

 

영화의 후반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의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화면에는 활기찬 도심의 거리나 기차역 풍경이 지나가고, 그동안 세월이 어느 정도 흘렀음을 암시합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큰 상실감에 잠겨 있지만, 그래도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려 애씁니다.

그는 아들을 잃은 죄책감과 슬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타인을 살리기 위해 치른 희생이라는 사실이 그를 이끌어주기도 합니다.  

 

한편, 어느 날 거리에서 한 젊은 여인이 아버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날 기차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마약 중독 여성이었습니다.

예전과 달리, 그녀는 말끔한 옷차림에 밝은 얼굴로 서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녀의 손에는 아기가 안겨 있습니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 그녀를 유심히 바라봅니다. 그녀도 아버지를 발견하고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짓습니다.

그리고 이내 따뜻하고 감사에 가득 찬 눈빛으로 미소를 보냅니다.

그녀가 더는 마약을 하지 않음을 암시하는 평온한 모습과 부모의 책임을 다하려는 듯한 태도가

아버지 눈에 들어옵니다. 

 

화면 너머로 알게 되듯이, 이 여성은 그날 기차가 강 위를 지날 때, 누군가 자신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렀음을 어렴풋이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불만에 찬 자기 행동을 후회하고 그 누군가의 희생에 합당한 삶을 살려고 결심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비록 아들을 잃었으나, 그 희생으로 인해 어떤 이는 삶을 되찾고 관계의 확장으로

나아갔음을 직접 확인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긴 시간 그를 짓눌렀던 슬픔이 어느 정도 해소되면서, 자신이 베푼 희생이 절대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사람과 섞이지 못하게 만드는 게 무엇일까요? 바로 ‘교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 교만은 무엇에 의해 사라집니까? 바로 실로암 탑이 무너지면서였습니다.

실로암은 파견된 자란 뜻입니다.

탑은 교만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파견된 그리스도의 교만이 무너진 순종으로 우리 안의 교만이 죽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거름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죽음으로 거름을 주십니다. 그것으로 우리 교만이 죽습니다.

저도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으로 교만이 죽어 눈물로 빠져나옴을 경험했습니다.

이때 세상에서 내가 가장 큰 죄인으로 느껴졌고

비로소 신학생들과 섞이기 시작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때 우리는 “그럼 주님, 제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 드릴 수 있을까요?”라고 묻습니다.

저에게는 당신께 붙어있으라고만 하셨습니다.

위 이야기에서 마약을 하던 여자 청년은 자기가 하던 잘못에서 돌아섰습니다.

주님의 희생에 자기 피를 섞은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주님의 희생에 내 피를 섞을 수 있어야 합니다.  

 

김희아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얼굴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모반이 지워지도록 손으로 문지르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더 슬프게 울고 계신 것을 봅니다.

그녀는 이렇게 결심을 말씀드립니다.  

 

 “제가 다시는 얼굴 때문에 하느님을 슬프게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는 하느님께서 제 모습 때문에 기뻐서 눈물을 흘리게 해드리겠습니다.

하느님 죄송합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림, 곧 그분의 제물에 나의 피를 쏟아야 합니다.

이것이 십일조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선악과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에 대해 아브라함도 십일조를 내려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

사제가 바치는 빵과 포도주에 우리 피가 섞여야 하는데 그것이 십일조입니다. 

 

하느님께 먼저 내어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내어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이 무언가를 나에게 해 주어서가 아니라 나에게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 때문입니다. 

 

이 겸손과 감사, 희생의 열매가 없다면 하느님 나라 포도밭에 머무는 사람들과 섞이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잘려져 불 속에 던져진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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