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루카 15,1-3.11-32: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11절). 여기서 작은아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달라고 한다. 작은아들은 아들의 자격을 잃어 마땅하였다. 작은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살아있는 아버지의 너그러움에 기대어 자기 쾌락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13절). 아버지에게서 떠난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장에서 떠난 사람이다. 그는 먼 고장에서 방탕하게 살며, 인자한 아버지께서 주신 재물을 모두 허비하였다. 이러한 삶은 어둠의 세계에 살며, 당신 얼굴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며, 아버지를 떠난 삶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떠난 자가 진짜 굶주리는 자이다. 영원한 양식으로 배를 채울 줄 모르는 자는 늘 굶주린다. 아버지의 사랑을 등진 그는 돼지 치는 신세가 되었다. 진흙투성이 돼지우리에 뒹굴며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쓰니까 그는 아버지의 집의 평화로운 생활을 등지고 떠난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괴로운 일인지 알게 된다. 그는 죄인이었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로 남아있었다. 창녀들과 어울리며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지만, 아버지를 떠나 남의 땅의 포로가 되었으나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작은아들은 아버지께 돌아오며 울부짖는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들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20절).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드러내거나 비참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입맞춤으로 아들의 죄를 용서하고 포옹으로 덮어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22절). 가장 좋은 옷은 영원불멸하는 영광을 아들에게 입히고 반지를 끼워줌으로써 예전에 지녔던 명예도 되찾아 준다. 신발을 신겨 주는 것은 발도 헐벗지 않게 하고 신발을 신은 채로 옛날의 삶으로 돌아오게 해 준 것이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23절). 되찾은 작은 아들을 위하여 준비된 송아지다. 들에서 돌아온 큰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춤추며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는 데도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동생을 심판한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 아들에게 말한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31-32절) 아버지의 것이 모두가 그의 것인데, 아버지와 함께 살던 모든 삶이 매일의 잔치였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종같이 살아온 큰아들에게는 기쁨이 없었다. 더구나 이제는 시샘 때문에 형제가 파멸하기를 바라니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여 기쁨을 맛볼 자격이 없다. 작은아들이 사랑의 모습을 되찾았기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으로 잔치에 참여할 자격을 얻었다면 큰아들도 아버지의 허락이 없으면 그 잔치에 참석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역시 모두 하느님의 사랑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1) 여기에도 신비가 있다. 창세기에서 악마는 동정이었던 하와에게 먼저 말을 건 다음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 말은 그들에게 죽음을 건네기 위한 말이었다. 동정 잉태의 사건에서는 거룩한 천사가 마리아에게 먼저 말하였고 다음에 요셉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앞의 사건에서는 죄와 죽음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고, 뒤의 사건에서는 구원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다. 앞의 사건에서는 여자로 말미암아 남자가 넘어졌고, 뒤의 사건은 동정녀로 말미암아 남자가 일어섰다. 그래서 천사는 요셉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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