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단식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첫날인 재의 수요일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이 시기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길 또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 그 의미를 모르지는 않으나, 임하는 자세가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함을 아울러 배웠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말씀의 주제는 단식, 어떻게 보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단식 문제입니다.
구약시대 유다인들은 속죄의 날(욤 키푸르)에 공동으로 단식을 했으며, 특히 예루살렘 포위와 파괴, 푸림절 등 과거의 국가적 재난을 기념하는 날에도 단식을 했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주 2회 단식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마르 2,18; 루카 18,12). 이들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규정한 의로움을 일부라도 단식으로 성취하려 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성격의 단식을 명하시지 않는 것은, 의로움 규정을 경시한다거나 폐지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은 의로움을 실천했다고 나팔 부는 것을 금하시며, 더 높은 경지의 의로움 실천을 요구하십니다. 곧 재물로부터의 해방과 자발적 금욕, 무엇보다도 십자가를 짊어지기 위한 자아포기를 역설하십니다.
보여주기 위한 단식 실천에는, 예언자들이 그토록 질타한 형식적이며 위선적인 모습, 곧 오만과 자기과시의 위험이 깔려 있습니다.
하느님께 기쁨이 되고, 그분 마음에 드는 참된 단식은,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소리 높이고 있는 대로, 고통 속에 있는 이웃들을 위한 사랑 실천과 연계되어야 하고, 자선과 기도에서 분리될 수 없는 행위, 궁극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는 행위이어야 함에도 말입니다.
엊그제 재의 수요일 복음에서 예수님은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식은 오로지 하느님만이 알고 계셔야 그분께 대한 믿음과 바람과 사랑의 순수한 표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신랑을 빼앗길 날, 그래서 신랑을 뵐 수 없는 날은 우선 주님의 십자가상 죽음과 묻힘 상황을 고려해 볼 수 있으나, 나아가 박해시대를 포함해서 주님을 자유로이 뵙기에 어려운 모든 날을 가리키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때의 단식은 슬픔과 좌절의 표지라기보다는, 주님을 다시 뵙고자 하는 열망의 몸짓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 주님 뵙기를 어렵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만드는 요소가 오로지 외부 환경에 의한 것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더 많은 경우가 내 마음이라는 내부적 요소에 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외부적 요소가 주님 뵙기를 방해한다면 신앙의 힘으로 싸워 이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단식을,
그것이 내부적 요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끊고 고치고 비워버리겠다는 신념의 표현으로 단식을,
그럼으로써 다시 주님을 뵈며 주님과 함께 걸어가겠다는 열망의 표현으로 단식을 다짐하며,
오늘 하루 거룩하고 은혜로운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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