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인격적으로 만나는 법: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곳에 빛이 떠오른다
오늘 복음은 실상 세상의 마지막 때를 예언하고 계십니다.
세상 마지막 때는 고통의 때 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사람의 아들이 권능을 떨치며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법입니다. 마지막은 항상 새로운 시작입니다.
목동들은 그 마지막 때에 아기 예수님을 만나 위로를 받았습니다.
당시 목동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직업이었습니다. 고통받는 이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보이시는
주님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마태오 복음엔 이런 이사야서의 인용이 있습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별은 밝은 도시가 아니라 깜깜한 시골에서 더 잘 보입니다.
우리가 죽음 직전까지 가지 않으면 생명이신 분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도 신학교에 들어가서 매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행복을 찾아 들어갔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행복하게 해주지 않으면 죽여달라는 마음으로
일주일 단식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 한번의 만남의 힘으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시간』이란 책에는 봉하령 요셉 신부의 기도 체험인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결정적인 사건, 죽을 고비」라는 꼭지가 있습니다.
봉하령 신부는 부모의 낙태 시도를 이기고 3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돌도 되기 전,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던 1월 동네 할머니가 아기를 업고 우물물을 길으려다
20미터 우물 속으로 떨어져 돌아가셨습니다. 아기도 죽었지만, 그를 구한 분이 침을 놓아 살렸습니다.
열 살 때는 친구들과 놀다가 경운기에 끼여 왼 팔은 잘렸고 오른 팔은 처참할 정도로 뭉게져버렸습니다.
오른 팔은 하루 꼬박 걸린 수술로 회복할 수 있었으나 왼 팔은 잃었습니다.
그 무렵 성당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는 팔을 감추고 본심도 감추었습니다.
그러다 ‘선택’이란 청년 피정에 가서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게 되었고 그때 자신이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청년이 되어서도 장애로 인해 취업을 할 수 없었던 그는 수도회에 입회하기로 합니다.
장애인을 받아주는 수도회가 없었지만, 갓 만들어지기 시작한 중증장애인을 돌보는
‘작은예수 수도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98년 서른셋의 나이에 한국 신학교에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2008년에 부제품을 받았으나 15년 동안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제품을 받지 못했습니다.
2023년 사제품을 받을 때까지 부제로 15년 정도 살아야 했습니다.
이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뛰쳐나가고 싶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풍선처럼 목구멍까지 차올랐고 숨을 쉴 수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봉 신부는 이때 ‘기도’를 선택했습니다.
늘 입에 이 노래를 달고 살았습니다.
“하느님, 내 하느님 어찌 저를 버리셨나이까. 하느님, 내 하느님 어찌 저를 버리셨나이까.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 생명의 하느님을 그리워하나이다.”
결국 숨이 막혀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에 오신 것도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신 것도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도 다 “너를 위해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봉 신부는 “고통이 없었다면, 아픔이 없었다면, 좌절이 없었다면 나는 그토록 애절하게 주님을
찾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그분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죽을만큼 원해야 생명이신 분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확실합니다.
‘엄마 찾아 3만리’를 보십시오.
엄마는 아들 마르코를 살리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먼 아르헨티나까지 돈을 벌러 갔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은 그만큼 멀리 있습니다.
그분을 만나려면 나도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너무 좋은 것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 단식하시며 광야에서 기도하신 만큼 절실히 주님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한 5년은 가슴이 저미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성체조배를 하면 잠깐 사라졌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바라고 싶습니다.
그래서 다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생명의 빛을 보고 싶다면 최대한 어둠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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