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가 아니라 박해 받지 못함을 두려워해야!
저는 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신부들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거기 있던 대부분 신부들이 저를 안 좋게 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살이 아니라 ‘순교’라고 어떤 분은 저를 야단치듯 말했습니다.
저는 어쨌거나 ‘자살은 자살 아닌가?’라는 생각은 하면서도 더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미국에선 바이든 대통령이 낙태를 찬성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성체를 거부한 사제가 있었습니다.
그 사제는 분명 바이든 대통령의 정당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비난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이도 저도 아닌 입장으로 박해를 피한 태도가 부끄럽게 여겨졌습니다.
이런 일이 점점 많아질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진짜 걱정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박해를 두려워해야 할까요, 아니면 박해를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 당신의 제자들이 박해당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 진정한 믿음을 가진 이들이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 만약 마지막 때 원숭이들이 믿음이 생겨서 성당에 모여 성체조배를 한다면 박해할까요? 신기해서 구경하기 위해 많이 몰려들 것입니다.
박해받는 이유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주장함으로써 말입니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2017)는 이런 세상 말기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이때가 되면 사람들은 세속-육신-마귀를 거의 신적으로 섬기게 됩니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사랑의 계명을 말하고 실천하는 이는 박해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 눈엣가시처럼 여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말을 못 하는 장애를 가진 비밀 정부 시설의 청소부입니다.
이때 그 정부 시설에서는 아마존의 수륙양용 인간형 생물을 포획합니다.
이 생물은 지역 주민들에게 신으로 숭배되지만,
가학적인 리차드 스트릭랜드 대령이 대표하는 미국 정부에 의해 잔혹한 실험을 당합니다.
엘리사는 그 생물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합니다. 그녀는 수화, 음악, 음식을 통해 그것과 소통합니다.
점점 더 커지는 그들의 관계는 다른 사람들이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 생물의 지능과 감정을 드러냅니다.
미국은 그 생물을 죽여 해부하여 군사력을 증가시키려 하고 러시아는 몰래 스파이를 시켜
그 생물을 죽이라고 합니다.
이 상황에서 엘리사는 청수부에 불과하지만, 그 생명체를 몰래 빼내는 작전을 수행합니다.
이렇게 되면서 미국과 러시아의 적이 됩니다.
결국 리차드 대령의 총에 맞아 그 생물도 죽고 엘리사도 죽습니다.
조선시대 때 가톨릭교회를 믿는 이들이 왜 박해받았습니까?
그들이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하느님 뜻 때문이었습니다.
평등은 사랑입니다.
믿음은 곧 그 믿는 대상의 뜻을 실현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기득권들이 그들을 가만히 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박해가 심해질수록 더 종말이 가깝습니다.
지금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수많은 박해가 일어납니다.
20세기에 순교한 이들이 19세기 동안 순교한 이들을 다 합친 수보다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은근슬쩍 진리를 말하지 않고 그들 편에 서서 박해를 피해야 할까요, 아니면 박해 때 성령께서 말씀하시도록 우리를 맡기는 연습을 해야 할까요?
이때 주님 편이 안 되면 적들 편에 서게 됩니다.
이 시험의 때가 가깝습니다.
요즘 교회의 모습도 참 진리보다는 내가 믿는 정당에 더 큰 표를 주는 듯하기도 합니다.
박해가 아니라 박해를 두려워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더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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