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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23일 _ 조욱현 토마스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11-23 조회수 : 57

사두가이란 보상을 바라고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여, 의로운 자라는 뜻으로 불린 명칭이다. 그들은 부활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것도 하나의 보상심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두가이들이 한 여인이 일곱 남편을 맞게 되는 경우를 들어 예수께 질문한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33절).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35절) 어째서 그럴까? 그들은 두 번 다시 죽지 않는다. 그들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주님께서는 다가오는 세상의 새로운 상황을 알려주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모습이란, 부활 자체가 결혼의 목적성을 상실해 더는 자손을 낳을 필요가 없다. 부활 때에는 사람들이 천사들과 같아지기 때문에(36절) 죽는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36절). 이것은 우리가 부활하게 되어 있고, 그 부활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에 연결되고 있다. 즉 부활로서 완전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자녀이다. 지금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분의 생명에 결합하여 있으므로 장차 부활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루카는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35절)에 대해서 말했다. 모든 일상의 삶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로 가는 진실한 하느님의 자녀임을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체험하기 시작한 사람만이 마지막 부활을 믿을 수 있고 또 갈망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37절)이라 한 것은 모세는 그 순간에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은 그 선조들과 생명의 관계에 있고, 신비스러운 친교를 통해 계속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순히 육체적인 사실로서가 아니라, 이미 하느님과 우리를 만나게 하는 그분과의 일치된 생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38절). 그리스도인은 현재 이 순간부터 그분과 사랑의 일치 속에 살아가야 하며, 그분과의 사랑의 일치 속에 사는 것이 참으로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이며, 이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이 하느님의 영광이라고 하였다. 항상 살아 있으면서 구원받은 사람의 삶을 이 땅에서부터 살아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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