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18,1-8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믿음은 맞지만, 무엇을 위해서가 더 중요하다.
오늘 복음은 종말에 관한 이야기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어제 복음은 마지막 때가 노아의 홍수 때나 소돔 땅이 멸망하는 것과 같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지막이 오는 이유는 세상에서 ‘믿음’이 사라져 마치 ‘시체’가 되어버린 곳에 ‘독수리’가 날아드는 꼴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믿음이 사라지면 시체가 되고 그러면 독수리가 모이듯 마지막 때가 올 것입니다.
믿음이 사라지면 종말이 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이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모든 종교가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함을 가르칩니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열렬히 기도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면 그 모든 기도가 다 믿음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과부가 기도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여기에서 ‘올바른 판결을 내리다’로 번역한 ‘에크디케오’의 뜻은 ‘변호하다’, ‘보복하다’,
‘벌하다’, ‘복수하다’란 뜻입니다. 같은 단어가 로마서 12,19절에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복수하다”로 해석했습니다.
‘에크디케오’는 정의를 실현한다는 의미인데, 적대자에게 정의를 실현하는 일은 분명 ‘복수’입니다.
믿음이란 우리 적대자에게 복수를 실현하여 나의 권리를 되찾아달라고 멈추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복수하게 해 달라고 그토록 끊임없이 청해야 하는 대상인 ‘적’은 무엇일까요?
내가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혹은 롯의 아내처럼 세상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은 특별히 ‘교만과 돈’이 이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다른 사람보다 정의롭다고 여겨 타인을 깔보는 바리사이의 기도가 나옵니다.
기도하는데 자기 자신을 들어 높이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돈이 많아서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적, 혹은 원수라 여기는 ‘삼구’(三仇)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구에게 벌을 내려 그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해 달라고 청하는 기도는 믿음이 있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삼구를 모르고 하는 기도는 다른 종교에서 하는 기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사탄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교리서에서 삼구 교리가 사라지게 했기 때문입니다.
영화 ‘엑스마키나’(2015)는 천재 과학자 네이든이 자신의 회사 직원 칼렙을 자기 연구실에 불러 자신이 만든 A.I. 로봇 에이바를 실험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네이든은 칼렙이 애정에 목마르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인공지능 로봇 에이바가 그를 유혹해
탈출을 시도하게 만듭니다.
칼렙은 그것도 모르고 정말 인공지능 로봇의 유혹에 말려듭니다.
어쩌면 자신이 만든 로봇에게 인간인 칼렙이 이용당하여 인간인 자신보다 예쁜 로봇을 더 믿고 더 애정을 두는 것을 보며 즐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일부러 그 로봇에게 유혹당하게 만들고 인간보다 그것을 더 믿게 만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발명입니까?
그러나 칼렙은 네이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천재였습니다.
이미 로봇에게 유혹을 당해 자신을 배신할 것을 안 네이든은 실험을 마치고 칼렙을 돌려보내려 합니다.
하지만 에이바가 문을 열고 나옵니다.
이미 칼렙이 문이 열리도록 프로그램해 놓은 것입니다.
결국, 간단한 실험으로 시작되었던 이것이 자신이 만든 로봇에게 자신이 칼에 찔려 죽음을 맞게 되는 결말에 이릅니다.
물론 그 로봇은 자신을 도와준 칼렙도 가둬놓고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버립니다.
칼렙이 진짜 누가 적인지 모르게 에이바에게 유혹을 당하도록 실험을 했던 네이든의 운명은 결국 죽음이었습니다.
적이 누구인지 모호하게 만드는 실험은 결국 자신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어쩌면 교회도 지금 이런 실험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비자 교리를 몇 달 동안 받아도 내가 누구와 싸우고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다 보면 그 지향이 오히려 싸워야 하는 욕구를 강화하는 것들이 됩니다.
세속적인 종교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교회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어쩌면 네이든처럼 위험한 실험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영화 ‘오블리비언’에서 주인공은 외계인이 자신을 만들고 자신들을 위해 일하도록 한 것을 잊고
오히려 자기 동족인 인간을 학살하는 일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모를 때 기도를 열심히 해도 롯의 아내처럼 소금기둥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삼구 교리에 무관심해진 것은 근래의 일입니다.
로마 교리서를 바탕으로 만든 기존 교리서 ‘천주교 요리문답’에서는 이 교리가 명확히 존재했습니다.
“179문: 영혼의 세 가지 원수는 무엇이뇨?
답: 영혼의 세 가지 원수는 마귀, 세속, 육신 삼구(三仇)니라.”
“230문: 굳셈(견진)의 효험은 무엇이뇨?
답: 굳셈의 효험은 우리의 신력(神力)을 더해 삼구를 용맹이 대적(對敵)하고 치명(致命)까지라도 하게 함이니라.”
견진은 성령을 청하는 성사이고 기도의 목적과도 같습니다.
성령을 얻고 성령으로 삼구와 대적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교리가 명확했던 것입니다.
또 김대건 신부님도 신자들에게 한 마디막 편지에서 이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마음으로 사랑해서 잊지 못할 신자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어려운 시절을 만나 부디 마음을 허실(虛失)하게 먹지 말고, 밤낮으로 주님의 도우심(主佑)을 빌어, 마귀와 세속과 육신의 세 원수(三仇)를 대적하십시오.
박해를 참아 받으며,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여러분의 영혼을 위한 큰일(靈魂大事)을 경영하십시오
아빌라의 데레사도 같은 말을 합니다.
“이런 악마들이 우리를 계속 겁에 질리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명예와 재산과 쾌락’(마귀-세속-육신)과 같은 다른 애착을 둠으로써 자신을 겁에 질리게 만드는 탓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혐오해야 할 것들을 사랑하고 갈망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적이 되고 마니까요. …”(「자서전」, 제25장, 21항 ).
돈에 대한 욕심, 육체의 즐거움, 그리고 교만한 마음은 우리가 혐오하고 싸워야 할 적입니다.
그것과 싸우기 위해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것을 모를 때 우리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됩니다.
바티칸에서 나온 『가톨릭교회교리서』도 명확히는 아니지만, 세 원수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초부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세상에 대한 ‘다스림’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다스림으로 실현되었다.
관능적 쾌락, 세상 재물에 대한 탐욕, 반이성적 자기주장 등 이 세 가지의 욕망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인간은 흠 없고 질서 잡힌 존재였다.”(「가톨릭교회교리서」, 377항)
믿음은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그 믿음이 그리스도교의 믿음이 되려면
그 기도의 지향이 삼구를 없애는 것이어야 합니다.
기도가 세 원수로부터 자유롭게 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청하는 기도가 되어 세속적인 종교가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교회가 네이든이 칼렙과 에이바에게 당한 것처럼 당하지 않으려면 자아와 삼구의 존재를 명확히 알려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교리서에서 삼구를 빼면 벌어질 일은 정말 기도하는 사람은 많아도 믿음이 없는 세상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서는 안 됩니다.
현재 우리 교회도 위험한 실험을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사랑을 통해 주님께서 계시되시듯, 삼구를 통해 사탄이 풀려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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