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어떤 모습의 성전이 지어지기를 원하셨을까?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사실 저는 이러한 축일이 썩 기쁘지 않습니다.
라테라노 성전 하면 떠오르는 것이 그 앞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상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다미아노 성당에서 “나의 성전을 재건하여라!”라고 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돌로 된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러다 수도회 회칙을 승인받기 위해 라테라노 성전으로 옵니다.
그곳에 교황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당의 규모에 놀랍니다.
그런 모습이 청동으로 라테라노 성당 앞쪽에 있습니다.
교황은 거지로 지내는 탁발 수도회를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하지만 꿈에 한 거지가 무너져가는 라테라노 성당을 어깨로 받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는 프란치스코를 다시 불로 회칙을 승인합니다.
나중에야 사람들은 주님께서 교회를 재건하라고 한 것은 눈에 보이는 다미아노 성당이 아닌 참 하느님의 성전을 의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장사꾼들이 가득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그리고 성전을 허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당신이 사흘 안에 성전을 다시 짓겠다고 하십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께서 사시는 성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16)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하느님을 경배하는 집입니다.
첫 성전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짓게 하신 성막입니다.
성막을 짓기 전에 그들이 가진 성전이 있었습니다.
바로 금송아지를 섬기는 성전입니다.
제단이 있으면 성전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지 않으면 새 성전이 지어질 수 없습니다.
돌로 된 성전은 그 크기가 커질수록 금송아지를 섬기는 성전이 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도 커다란 성전을 지어놓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장사꾼들을 들여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전을 지으신 일이 없습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가는 곳이 다 성전이었습니다.
사실 신약의 첫 성전은 성 목요일의 마르코의 다락방이라고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성전들이 모이는 곳에 따로 또 다른 성전이라 불리는 돌로 된 것을 지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교회의 뜨거움이 식어가기 시작하였을 때는 커다란 성전이 지어지는 때부터였다고 생각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교황 이노첸시우스 4세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청의 발코니에서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중세 때의 교회의 부와 권력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았고 낮은 위치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마침 교황청으로 돈 주머니가 수송되어 오는 행렬이 있었습니다.
교황은 그것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저기 봐요. 이제는 ‘금과 은은 내게 없노라’고 교회가 말하던 그런 시대는 지나갔소.”
이 말은 성전에서 교회의 수장이었던 베드로와 함께 요한이 지나갈 때 앉은뱅이가 자선을 청하자, 베드로가 대답했던 말을 인용해 그 때처럼 가난한 교회가 아니라는 뜻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토마스 성인이 이를 받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앉은뱅이더러 ‘일어나 걸어라.’하고 교회가 말할 수 있던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시선을 집중하면 멀리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세상 것에 먼저 시선을 두면 세상 것 안에 머물러 주님이 주시는 초자연적인 은총은 얻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로 토마스가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영과 육은 서로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육에 치우친 사람은 영적인 삶을 절대로 살 수 없게 됩니다.
솔로몬에 커다란 성전을 지었을 때부터 나라가 갈라졌습니다.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가 성전을 재건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성전이 헤로데가 리모델링 한 성전인데 그 규모가 너무 커서 장사꾼들을
들여보내 세금을 거둬내야만 했습니다.
로마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종교가 자유를 갖게 되었을 때부터 커다란 성전이 지어지기 시작하였고 그 뜨거움이 식어갔습니다.
바티칸 성전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매우 필요하여 어쨌건 개신교가 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성전의 크기는 신자들의 자존심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옆의 다른 성당과 비교해서 조금 더 크고 화려한 것을 원합니다.
그것을 위해 많은 돈을 냅니다.
이렇게 되면 성직자들은 그 성당을 유지하기 위해 돈에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돈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기도 합니다.
요한 묵시록에는 참 하느님의 성전이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이때가 되면 하느님의 거룩한 도성 천상 예루살렘에서는 성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묵시 21, 22)
일본의 원폭피해를 전 세계적으로 알린 한 작가가 있습니다.
나가이 다카시입니다.
의사였던 그는 본인도 원폭 피해를 입고 백혈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지만, 그 시한부 인생 동안 무려 17권의 책을 집필하여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전쟁의 참혹함을 알렸습니다.
그는 한 평짜리 집을 마련하고 ‘여기당(여기 애인(如己愛人: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의 줄임말)’ 이란 이름을 붙여 두 자녀와 함께 지내며 글을 썼습니다.
여기당은 유리로 돼 있는데 옆으로 보면 성당 성모상이 보여, 그 성모님을 보며 묵주기도를
바치고 글을 썼습니다.
매년 20만 명 가까이 순례객이 여기당을 찾고 있습니다.
한 평짜리 집이지만 매년 20만 명이 찾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커다란 성당은 원자폭탄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희생이 담긴 여기당은 지금도 건재합니다.
어쩌면 외적인 성전 건물이 커지면 내적 성전은 피폐하여가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은 먼저 멋지고 화려한 성전을 허물라고 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그 크고 화려한 건물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까요?
성전이 크기 때문에 장사꾼이 모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 유지 관리를 위해 그들을 허락하였을 것입니다.
만약 작은 성당이라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성전이 크면 장사꾼이 모입니다.
우리 각자의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프란치스코가 묵었던 토굴, 그리고 여기당이 예수님께서 원하신 참 성전이 아닐까요?
성전이 우리들의 자존심을 상징한다면 그러한 성당은 무너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을 유지할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그리스도의 희생이 담긴 참 성전이 세워집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돈이 들어왔을 때 성당을 짓지 않고 학교를 지었습니다.
그러한 학교에서 하는 미사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성전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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