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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27일 _ 조욱현 토마스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10-27 조회수 : 112

복음: 마르 10,46-52: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예리고의 맹인 바르티매오의 치유의 기적은 하나의 “표지”로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앞에 “빛”을 필요로 함을 가르쳐주고 있다. 즉 바르티매오의 되찾은 시력은 우리가 항상 청해야할 신앙의 빛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을 보면 그것을 만들어내지도 못하면서 너무나 쉽게 그 빛을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줄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 빛은 우리가 청하고 받아들일 자세만 되어있다면 하늘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선물이다. 복음에서도 이 같은 사실이 맹인의 치유사화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이 치유사화는 마태오 복음(20,29-34)과 루카 복음(18,35-43)에도 나타나는데 모두가 수난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수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한 것이며, 이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내적인 “빛=밝음”은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맥락은 베싸이다의 소경이 서서히 시력을 찾는 장면을 시작으로(마르 8,22-26),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서의 베드로의 신앙고백(8,27-30)과 예수께서 수난에 대한 예고를 하셨을 때 베드로가 펄쩍 뛰는 장면을(8,31-33) 생각할 수 있다. 신앙의 절정 상태에 있던 베드로조차 하느님의 계획에는 눈이 멀려고 한다. 하느님의 계획들은 결코 어떤 순간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빛에 의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마치 베싸이다의 소경이 서서히 시력을 회복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복음을 보자. 소경 바르티매오는 예수께 절규에 가까운 도움을 청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눈이 멂”으로 당하는 비극적 현실 때문만이 아니라, 예수님이야말로 자기를 구원해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를 부르시자 그는 전 생애를 거쳐 그 순간을 기다리기나 한 듯이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난다. 그의 믿음은 헛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믿음에 대해 강조하시고,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2절) 하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소경은 어떻게 하는가? 그 소경은 눈을 뜨자마자 “예수를 따라 길을 나섰다.”(52절). 이것은 믿음이 그의 눈을 열어주어 그리스도의 사명을 깨닫게 하고 그분을 따라나서게 하였다. 여기서 예수를 보는 데만 호기심이 있고 그 수난에 관해서는 관심도 없는 군중들과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세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고 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47절) 예수께서는 메시아라는 명칭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정치적으로도 위험한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도 받아들이신다.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에 들어섰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성취되어야 할 목적지에 도달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메시아의 비밀이 벗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메시아는 유다인들이 기대했던 그런 의미의 메시아는 아니셨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치유된 소경 바르티매오가 한 것처럼 바로 그 길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불림을 받고 있다. 바르티매오의 치유는 믿음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징표일 뿐이다. 믿음은 그 소경의 경우, 예수의 중재 역할로 그를 낫게 하여 구원하였듯이 우리를 예수님과 결합하여 그분이 가신 희생의 길을 따라가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참된 치유를 베풀어주고 또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해준다.”(R. Schnackenburg, Vangelo secondo Marco, Roma 1973, Vol. II, pp. 125-126). 

 

히브리서는 그리스도를 대사제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구약의 사제직을 무한히 초월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희생제물을 봉헌하는 것이다. 구약의 대사제는 여러 번 그리고 백성들과 자기 자신의 죄를 위해 속죄의 제물을 봉헌했지만(히브 5,3),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기 때문에 단 한 번 희생제물을 바치셨지만 완전한 제물을 봉헌하셨다. 당신 자신을 형제들을 위해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의 희생적 의지 때문에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 10,10). 여기에 나오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히브 5,6)는 것도 그가 창세기에 나오는 신비스러운 왕이며 사제라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척도는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절대적인 새로움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제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희생에 이르는 그 길을 따르기 위해서는 예리코의 맹인 바르티매오와 같은 큰 믿음의 빛이 필요하다. 우리가 언제나 당신의 신비를 깨달아 알아보고, 베드로와 같이 하느님의 뜻에 눈이 멀지 않도록 하며, 또 그 신비를 우리의 삶으로 실천할 수 있는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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