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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2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10-26 조회수 : 227

죄로부터의 회개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늘 복음은 ‘회개’가 주제입니다.

회개는 무엇으로부터 돌아서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결심입니다.

무엇으로부터 돌아서야 할까요? 우리가 지은 죄일까요? 아닙니다.

죄에서 회개하려면 영원히 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더 근본적인 게 회개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회개의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멸망하리라고 하십니다.

마치 삼 년 동안 열심히 거름을 주며 가꾸던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결국엔 잘리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서 무화과나무는 ‘믿음’과 관련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몸을 가린 것이

무화과나무 잎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을 잃었을 때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자신을 가렸습니다.

무화과나무에서 잎은 믿음이 없음을 상징하고 열매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회개는 ‘믿음’과 관련됩니다.

특별히 나 자신을 믿는 삶에서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회개해야 했던 것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이 아니라 뱀을 믿었다는 것이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한 행동에서만 회개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회개한 삶이 아닙니다. 

이를 잘 나타내주는 영화가 ‘밀양’입니다.  

 

영화 ‘밀양’은 회개에 대한 의미를 성찰하게 해줍니다.

분명 전도연 씨는 믿음을 갖게 되어 용서해 주기 위해 자기 아들을 유괴 살인한 범죄자를 찾아갔습니다.

자신도 잘한 것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시골에 와서 돈 많다고 떠벌리고 다녀서 결국 아들이 유괴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유괴범은 평온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납니다.

그리고 교회를 다시 나가지 않게 됩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자기도 죄가 있었다고 회개했지만,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죄로부터의 회개를 넘어서 ‘나’에게서 회개해야 합니다.

나에게서 회개하지 않고 죄에서만 회개하려는 것은 여전히 내가 죄를 짓지 않을 힘이 있다는 교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가 죽지 않는 한 나는 여전히 하느님과 대적하는 자가 됩니다.

나를 믿지 않고 나를 죽이는 봉헌이 되어야지 회개지 내가 한 행위에서 아무리 회개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나의 부정’과 ‘하느님 인정’이 바로 회개입니다.

나의 믿음에서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으로 돌리는 게 회개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오늘 복음을 다시 살펴봅시다. 갈릴래아 사람들은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다가 빌리도에게 살해당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제물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바치는 제물 때문에 자신이 깨끗해진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제물을 바친다고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물을 바치면서도 여전히 나를 믿을 수 있습니다.

제물에는 나를 신뢰하는 마음이 못 박혀 그 피가 섞여 있어야 합니다.

그게 안 되니 그런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제물이 주님께 무슨 가치가 있어서 주님께서 그 제물 덕분으로 나를 깨끗하게

해주어야 하거나 무언가 나에게 해주어야 한다고 믿으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제물로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내가 죽었는데 무엇을 바랍니까?

그냥 받은 것에 감사해서 앞으로도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마음으로 봉헌해야 합니다.  

 

실로암의 탑이 무너져서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로암은 파견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곧 세례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세례는 받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죽은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열여덟을 ‘여섯 + 여섯 + 여섯’으로 보고 있습니다.

666. 짐승의 숫자입니다.

‘세속-육신-마귀’로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탑은 ‘자아’입니다. 

 

결국, 주님의 뜻으로 씻기만 하면 깨끗해지는 실로암이 있는지 자기를 믿었기에 그 자신에 깔려

죽게 될 것이란 뜻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은총은 주님 무상의 선물입니다.

실로암과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자격이 있어서 그런 은총을 받는다고 믿거나 세속-육신-마귀를 탑처럼 세워놓고 은총을 받으려 한다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나를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앵그리스트맨’(2014)은 인생의 모든 게 불만인 헨리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유일한 아들은 자신이 원하는 공부가 아닌 춤을 배운다고 해서 연을 끊었고 아내와도 별거 중입니다.  

 

그러다 갑자기 자신과 비슷하게 인생을 비관하는 의사에게 뇌동맥류라는 판정을 받습니다.

언제든 뇌혈관이 터져 사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참 열이 받은 주인공은 도대체 그러면 얼마나 사느냐고 묻습니다.

의사도 자신에게 다그치는 그 사람이 싫어서 그냥 ‘90분’이라고 말해버립니다.

곧 터지니 정밀검사를 받자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뛰쳐나가 마지막 90분 동안 해야 할 일을 찾습니다.  

 

세 가지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는데 첫 번째는 아내와 화해하는 것, 두 번째는 아들과 화해하는 것, 세 번째는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보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갔더니 다른 남자와 있었고, 아들은 전화를 받지 않고, 동창은 단 한 명 나왔는데

어렸을 때 여자친구를 뺏긴 것 때문에 당장 죽을 사람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뇌가 터지든 말든 이젠 살고 싶지 않은 주인공은 다리에서 뛰어내립니다.

하지만 주치의는 주인공이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 재빨리 그를 구합니다.

그리고 지금 혈관이 새고 있으니 병원으로 가자고 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뛰어내릴 때 이미 자존심까지 죽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아들이 춤 연습하는 곳으로 가기로 합니다.

그리고 2년 만에 처음으로 용기를 내서 아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용서를 청합니다.

어렸을 때 아들과 함께 췄던 춤을 춥니다. 

 

주인공은 수술하고 8일을 더 삽니다.

그러면서 아내와도 친구와도 화해합니다.  

 

봉헌은 바로 헨리가 물로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내 힘으로 무언가 해 보려는 것이 아닌 주님께 맡기는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이렇게 더는 나를 믿지 않겠다는 회개는 참된 봉헌으로만 표현됩니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놓지 않는다는 말은 끝내 나를 믿겠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믿을 때 가장 먼저 믿게 되는 게 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봉헌이 나를 믿지 않는다는 결심입니다.  

 

선악과가 그렇게 봉헌되어야 했습니다.

선악과의 봉헌은 더는 뱀을 믿지 않고 주님을 믿는다는 신앙표현입니다.

그 때문에 회개는 봉헌과 직결됩니다.

이 선악과가 구약에서는 십일조가 되었고 예수님도 내라고 말씀하셨고 미사 때 빵과 포도주로 봉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끝끝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어떻게 될까요?

오늘 예수님은 무서운 결말을 제시하시며 참된 회개의 표징을 봉헌으로 표현하라고 재촉하시는 것입니다.  

 

회개는 내가 나를 의지하지 않겠다고 내 피를 제물에 섞어 봉헌하는 것이고, 주님의 성사에 위탁하겠다고 내 자아의 탑을 무너뜨려 교회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 봉헌에 내 피를 섞고 그래서 내 힘을 빼고 교회의 성사에 위탁합시다.

이것이 회개의 표징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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