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12,39-48
제때 양식을 주는 일이 왜 유일한 행복의 길인가?
오늘 복음은 심판 때 깨어있으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심판 때 당신이 함께 계신 것처럼 제때
정해진 ‘양식’을 내어주는 집사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그러나 주인이 늦게 오겠거니 생각해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종들은 매를 많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며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주님께서 일을 맡기시는 이유는 그러니까 ‘행복’입니다.
일을 더 많이 맡기시는 이유는 우리가 더 행복해지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행복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행복은 ‘자존감’에 달려 있습니다.
외적으로 복권에 당첨되어 돈을 많이 벌게 되거나, 안 좋은 일이 발생하여 몸이 아프게 되어도, 몇 주, 몇 달 뒤에는 이전의 행복 수준으로
되돌아옵니다.
이것은 실험을 통해 증명된 사실입니다.
한 환경미화원이 열심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새벽부터 악취와 먼지를 뒤집어쓰고, 쓰레기통을
비우며 거리를 청소했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도 아니고, 월급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미화원은 싱글벙글 밝은 모습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젊은이가 물었습니다.
“힘들지 않으세요? 어떻게 항상 그렇게 행복한 표정으로 일하실 수 있죠?”
그러자 환경미화원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는 지금 지구의 한 모퉁이를 청소하고 있다네.”
직업이 행복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의미가 행복을 결정합니다.
같은 환경미화 일을 해도 누군가는 그 일을 단순한 거리 청소나 돈벌이로 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지구를 깨끗하게 하는 일로 바라봅니다.
어떤 사람이 더 행복할까요? 당연히 지구를 깨끗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객관적 상황이나 조건이 행복과 무관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같은 조건이라면, 결국 행복은 자존감과 연결됩니다.
자존감은 자신이 자기를 바라보는 가치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행복 수준은 자기 스스로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좀 야한 부분에 대해 말해볼까요? 만약 부부관계를 한다고 가정해봅시다.
어쩌면 많은 사람이 첫날밤을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내가 상대에게 충분한 행복을 받았지만, 내가 상대를 충분히 만족시켜주지 못했다면 그래도 행복할까요?
남자들은 그래서 더 지속하는 약을 먹기도 하고 여자들은 인터넷으로 남자를 더 행복하게 해 주는 방법들을 찾아보기도 합니다.
이는 사랑을 받을 때보다 내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가 더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때 행복합니다. 그런데 행복의 수준은 자존감입니다.
자존감은 ‘양식’에 의해 생겨납니다.
사람에게 양식을 먹는 개들은 자신들도 사람인 것처럼 행복해합니다.
그래서 만약 사람에게 버림을 받으면 같은 개들 무리에서는 그 행복을 더는 느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자기를 버린 주인을 몇 년 동안 같은 곳에서 기다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왜 흙에 불과한 우리를 당신 자녀로 창조하셨을까요? 누군가에게 하느님의 행복을
주실 때에야만 하느님으로서의 영광과 행복을 누리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당신 자녀로 삼으셨으면 에덴동산에서 동물들에게도 이름을
지어주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이라는 자존감을 주는 양식을 그들에게도 제공해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일을 시키심으로써 당신 자존감과 행복에 참여하게 하신 것입니다.
“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 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창조한 이들, 내가 빚어 만든 이들을 모두 데려오너라.”(이사 43,7)
행복은 다 이기적입니다.
남이 행복해서 자신도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자긍심이 자신을 행복하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생명의 양식을 내어주라고 우리를 파견하셨습니다.
진짜 행복은 내가 이웃에게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줄 수 있는 양식이 되어주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내가 이웃에게 하느님 행복을 줄 수 있는 ‘생명의 빵’이라는 자존감을 잃지 맙시다.
이것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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