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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20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10-20 조회수 : 94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 주일) 

 

마태오 28,16-20 

 

선교의 기본이자 시작: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 이름 말하기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시며 선교 사명을 주십니다.

그런 이들에게 당신께서 함께하실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선교는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이자 명령입니다. 선교하지 않으면 사랑하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선교는 곧 사랑 실천입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강이 불어난 곳의 다리를 집에서 창문으로 보다가 다리가 끊기게 될 것 같아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재빨리 나가 차량을 통제한 적이 있습니다.

한 차량이 반대쪽에서 오자 손을 엑스자로 그리며 차를 막아섰고 그 차가 멈추었을 때 바로 그 앞에서 다리가 무너졌습니다.

이 사람이 집에서 TV만 보고 있었다면 과연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곧 하느님 자녀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요? 예언자직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예언자직의 끝은 무엇일까요? 죽음입니다.

예수님도 예언자직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떤 가수가 공연하는데 사람들이 야유하며 다 떠나버린다면 마음이 어떨까요?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두려워서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면? 더는 가수가 아닐 것입니다.

사제가 강론이 두려워 미사를 꺼린다면 주님께 사제로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선교의 가장 큰 적은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미국 네브래스카주 한 시골 목장에 사는 12살 소년 ‘로건’이 휴스턴에 있는 크리스천 라디오 방송국에 전화해서 진행자인 마이크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소년은 울먹였습니다. 

 

자신이 소중하게 아끼던 송아지가 몸이 약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전화한 것은 그 슬픔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 왜 자신이 아끼던 송아지를 데려가셨는지 물었을 때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로건, 내 아들도 나에게 소중했단다.

하지만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어야 했어.”

로건은 누구든 자신이 아끼는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항상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용기가 없는 이유는 하느님 체험이 없어서입니다.

그러나 그 체험은 한 번쯤 나가게 만드는 마중물에 불과합니다.

지속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먼저 한 번이라도 자신의 체험을 전하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개신교에서 전교로 유명한 분 중의 하나가 ‘고구마 전도왕 김기동 목사’입니다.

그가 목사가 되기 전에 아내와 딸이 주일에 교회 가지 못하게 하고 스키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사고가 크게 났고 불교 신자였지만,

하느님께 기도하여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할 용기는 없었습니다.

목사님께 전도 연습으로 끌려 나가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기도 중에 고구마에 대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사람들을 고구마로 보는 것입니다.

전도란 그저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 찔러 보는 것이라는 것.  

 

그는 “예수 믿으십니까?”, “그래도 믿으셔야 합니다.”, “믿으면 참 좋아요.”, “기도하겠습니다.”

라는 네 마디를 하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 믿으십니까?”입니다.

“교회 다니십니까?”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먼저 예수님 이름이 입 밖으로 나와야 그다음이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 8,38)라고 하십니다.  

 

저도 한 선교왕을 아는데, 그분은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마다 “찬미 예수님!”을 합니다.

그런데도 1년에 30명씩 성당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예수님 이름에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선교하지 못해도 마음이 뿌듯하다고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으니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어떤 집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합니다.

먹을 것을 좀 주십시오.”라고 했을 때 욕을 먹고 매를 맞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찬미 예수님!”은 강론 전이나 어머니와 통화할 때 정도만 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모든 사람에게 인사할 때 예수님의 이름이 나오게 할 결심을 해 봅니다.

신자들과 길거리 선교를 할 생각도 있습니다. 그저 “찬미 예수님!”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우리 입에서 누구 앞에서건 예수님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하는 것, 이것이 선교의 시작일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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