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의 방법?: 매력적인 공동체를 먼저 만들라!
오늘은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성 루카는 바오로 사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에 대해 어떤 복음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였고 가난한 이들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철저한 자료수집을 통해 복음서를 쓰고 또 바오로 사도와 베드로 등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을 사도행전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이렇듯이 사도단 안에 머무르며 자신이 배우고 익힌 것을 선교를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선교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선교만큼 큰 사랑실천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선교의 열정이 이전보다 많이 떨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선교의 열정이 떨어지자 선교의 ‘방법’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고해성사가 어려워서 성당에 나오지 않는 것 같으니 SNS나 인터넷을 통해 편하게 성사를
볼 수 있게 해야 하고, 코로나 시대에 TV로 인사하여 성당에 와서는 자판기 같은 것으로
성체를 영하게 하자는 식의 의견도 제시됩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의견들이지만 설사 그렇게 한다고 해서 더 많은 신앙인이 성당에 나올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우리는 무언가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교의 목적이 세례를 받고 성사에 참여하게 하기 위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사는 공동체 형성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엄마를 통해 아빠를 만나게 되는 것처럼 우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만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모으시고 그들을 둘씩 파견하셨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이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공동체입니다.
파견된 것을 먼저 만나지 못하면 파견하신 분은 너무 멀리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시행되는 성사는 선교의 목적이 아닌 공동체 형성에 있습니다.
그 공동체가 온전히 형성되었을 때 선교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허성 야고보 신부님은 한 때 가정법원 옆에 있는 부산의 모 성당에서 본당 신부를 하고 계셨습니다.
한 번은 이혼하려는 부부가 성당에서 서성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정을 물으니 이혼하려고 법원에 왔는데 점심시간이라 2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 갈 데가 없어서 성당으로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성당에 잠깐 앉아 있었지만, 기도가 되지 않아서 다시 나왔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무엇 때문에 이혼하려고 하느냐고 물었는데, 남편이 먼저 “이 사람은 제가 무슨 일만 하려고 하면 반대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자매가 “당신이 잘했어 봐라. 내가 반대하나?”라고 하며 언성이 높아지고 마구 싸우더라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화를 내시며 “아니, 싸우다가도 어른이 오시면 싸움을 멈추는 법인데 신부 앞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잘못했다고 용서를 청했고 신부님은 그러면 보속으로 2시간 동안 성체조배를 하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2시간 뒤 사제관에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울면서 들어왔습니다.
2시간 동안 있다 보니 서로의 잘못이 자기에게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신부님이 보는 앞에서 이혼서류를 찢어버렸고, 신부님은 바로 혼인 갱신 예식을
해 주었습니다.
둘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사를 영하는 목적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만남의 목적은 공동체 형성에 있습니다.
공동체가 형성되면 비로소 자녀가 탄생하게 됩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우리가 선교를 위해 먼저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소공동체 시스템의 재정립입니다.
문제는 아직도 3년에 한 번 고해성사만 하면 냉담자가 아니라는 정책을 쓰고 있는 것에 있는 것 같습니다.
성사의 목적은 공동체의 형성을 위한 힘을 주는 데 있는데도 그냥 오랜만에 나와서 잠깐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만 하면 신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성사의 참례 여부로 냉담자를 가려내는 것은 공동체 친교의 중요성을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면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당신 제자로
알아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공동체를 형성하시고
그 형성된 공동체가 선교하게 만드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은 특별한 것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합니다.
1973년 할리데이비슨은 미국 오토바이 시장의
77.5%라는 거의 독보적인 시장점유율을 차지했습니다.
1969년 잭 니컬슨과 대니스 호퍼의 ‘이지라이더’가 상영된 이후 할리데이비슨은
미국 남성들의 로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모터사이클은 말론 브란도의 ‘위험한 질주’(1953)에서처럼 ‘반항의 아이콘’이란 이미지도 새겨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1948년 구성된 헬스 엔젤스(지옥의 천사들)는 수십 대의 모터사이클을 타고 다니며
폭동을 일으키기도 해서 할리데이비슨을 타는 사람들이 폭력조직과 비슷하게 여겨졌습니다.
엔젤스 단원들은 한때 유명 가수들의 공연 안전요원을 맡기도 했는데 폭력과 살인 사건까지 발생하였습니다.
이때 저렴하고 가볍고 고성능인 오토바이들이 미국을 침략했습니다.
바로 일본의 야마하, 혼다, 스즈키 오토바이들이었습니다.
할리 데이비드슨을 타면 갱스터라는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일본 모터사이클을 선호했습니다.
이때 혼다의 로고는 이랬습니다.
“혼다를 탄 가장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세요.”(You meet the nicest people on Honda)
이렇게 80년대 들어와서는 미국에서 반 이상이 일본 모터사이클을 탔고 할리 데이비드슨은 25% 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렇다고 할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1983년 할리 마케팅팀은 ‘우리가 직접 새로운 오토바이 갱을 만들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를 내고 할리의 본질적인 무게감은 유지하면서 범죄집단이라는 오명을 벗어버리는 ‘호그’(Harley Owner’s Group)을 만들었습니다.
처음 4년 동안 7만 3,000명의 멤버들이 등록했고, 오늘날 그 숫자는 거의 50만 명에 육박합니다.
할리데이비슨 회사에서는 그저 그들의 모임과 경주 등의 이벤트를 제공하며 자랑스러움을
주는 일을 하면 모든 홍보는 그들 자체가 수행하고 고정적인 매출원이 되는 것입니다.
현재 방탄소년단이 안정적일 수 있는 이유도 엄청난 숫자의 아미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방탄소년단이 일일이 다 이름을 알 수도 없고 친분을 가질 수도 없지만, 그저 방탄소년단의 가장 강력한 지지층이라는 것에 만족감을 얻고 충성을 다합니다.
결국, 자신을 홍보하는 것은 자신을 지지해주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들이 행복하고 자랑스럽게 만들어주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교회 소공동체나 단체에서 행복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안 모일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 시스템을 만들어주고 자랑스러움을 넣어주는 일만 하면 됩니다.
호그의 웹사이트 제작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에겐 자기 자신보다 더 위대한 뭔가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하는 기본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최고경영자에서부터 새로 할리를 구입한 오너와 라이더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할리데이비슨을 하나의 크고 행복한 가족으로 여깁니다.
당신이 속하고 싶은 곳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당장 H.O.G에 가입하십시오.”
우리 선교의 마인드도 “할리 데이비드슨을 타보세요. 얼마나 좋은데요?”라는 다소 황망한
방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성체를 영해 보세요. 안 그러면 구원 못 받아요.”라는 식의 마인드는 벗어버려야 합니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는 ‘소속감을 느끼고 싶은 욕구’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사실 젖보다는 엄마의 따듯한 품을 더 찾습니다.
소속은 근원적인 존재의 불안함을 달래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당 가족 공동체는 너무 행복합니다.
그 공동체어 머무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선교의 방법? 방법은 이것입니다.
모든 성당 가족 구성원들이 공동체에 속하여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여 우리 공동체가 자랑스럽게 만들기.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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