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개에게 물린 이후로 저는 개를 보면 피하기 바빴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여름방학 중에 형님 가족이 기르는 반려견(이름: 두리, 견종: 비숑 프리제)을 데려다가 사제관에서 며칠 지낸 적이 있습니다. 본래는 일주일 정도 데리고 있으려고 했는데, 이틀을 지내고 나니 도저히 안 되겠기에 사흘째 되는 날 도로 데려다주었지요. 그런데 당시에 제가 더 함께하지 못한 이유는 두리가 너무 사랑스러워서였답니다. 사제관에 데려오는 순간부터 두리는 제가 어딜 가든 졸졸 쫓아다니고, 밖에 나가려고 하면 쫓아와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습니다. 밤에 잘 때도 거실에 마련해 준 잠자리가 아닌 바로 제 침대 밑에 밤새 쪼그리고 있었지요. 그래서 이러다가는 나도, 두리도 병들겠다 싶어 사흘 만에 반납(?)해야 했습니다.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여기는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 더는 낯설지 않습니다. 이른바 ‘개모차’가 유모차 판매량을 넘어섰다는 말이 들릴 정도입니다. 이런 현상은 1인 가구 증가와 가족구성원 간 교류 감소로 인해 인간관계를 통해 충족되어야 하는 친밀감을 반려동물에게서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동물이 우리에게 정서적으로 좋은 영향을 주고, 안내견이나 구조견과 같이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한 가지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동물을 인간처럼 대하는 것이 과연 창조질서에 부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윤리학 용어 중에 ‘윤리적 주체(moral subject)’와 ‘윤리적 객체(moral object)’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윤리적 주체’란 이성적 능력을 바탕으로 선과 악의 범주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존재를 말하고, ‘윤리적 객체’는 윤리적 주체가 행동할 때 윤리적으로 대우해야 하는 대상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윤리적 주체이고 반려견은 윤리적 객체로, 전자에게는 행동의 책임이 따르지만, 후자에게는 책임을 논할 수 없지요. 이러한 구분은 우리에게 중요한 점을 시사해 줍니다. 인간과 동물이 동시에 곤경에 처했을 때 누구에게 먼저 도움을 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을 제시해주기 때문입니다. 윤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가 그렇지 않은 존재보다 도덕적 지위가 높다는 것은 자명하고, 그 지위에 맞갖은 대우를 하는 것이 타당하겠지요. 우선순위는 항상 인간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모든 동물을 데려다주시어 그들의 이름을 지어주게 하십니다(창세 2,19 참조). 이름을 지어 부른다는 것은 그 대상과 관계 맺음을 시작한다는 의미이고, 여기서 주도권은 인간에게 있습니다. 이름을 지어 부르며 돌봐주는 인간과 돌봄을 받기만 할 수밖에 없는 동물은 엄연히 차원이 다른 존재입니다. 개가 ‘반려인(人)’을 키울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솔직히 나중에 형님댁에 갔을 때 “두리야 이리와~” 해도 두리가 저를 못 본 체한다면, 조금 서운하긴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리를 탓할 수는 없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