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신림동에 있는 고시촌에서 고시 공부를 할 때 유일한 안식처는 주일 저녁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그때만큼 간절히 기도한 적이 없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간절함과 불안함을 핑계로 하느님께 제대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수없이 남발했습니다. “저 시험 합격만 시켜주시면 어려움에 처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평생 헌신하며 살겠습니다.”라든가, “제발 시험 합격만 허락해 주시면 평생 교회와 신자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겠습니다.”, “하느님, 저 변호사 되면 꼭 ‘어떤, 어떤 것’들을 할게요.” 등으로 말입니다.
막상 변호사가 되어 그 간절함과 불안함이 어느 정도 해소된 지금, 그때 하느님과 했던 약속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자문하면 그저 부끄러울 뿐입니다.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Pacta sunt servanda)’라는 법언(法諺)이 있습니다. 이는 중세 로마인의 법전에도 명시되어 있는 사회생활의 기본이 되는 오래된 원칙이지만, 현대에 와서도 그 약속이 불공정한 것이거나, 선량한 풍속이나 사회질서에 반하는 내용이거나, 사기나 강박 등에 의한 것이 아닌 한, 여전히 민사상 대원칙으로써 그 구속력이 인정되고 있습니다.
약속이란 모든 인간관계에서 신뢰와 예측이라는 사회생활의 기본이 되는 매개체이기에, 때로는 법률의 형태로 사회구성원 모두를 구속하는 힘을 지니며, 때로는 법적 강제력은 없지만 그에 버금가는 도덕적 책임을 부여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약속을 하고서도 이를 지키지 않으면 그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고 거기서 각종 사회적 분란이 발생하게 됩니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면 누구나 새해 다짐을 하듯이, 신앙인인 우리 역시 내 자신과의 다짐을 비롯해 하느님께도 여러 가지 약속을 합니다.
새해가 시작된 지 벌써 3주가 지났습니다. 지난 3주 동안 하느님과의 약속을 제대로 지키셨는지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의 약속에도 이를 지켜야 하는 법적인, 또는 도덕적인 책임이 있을진대, 유독 하느님과의 약속에는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더라도 스스로 너무 관대했던 것은 아닌지 저부터 반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과의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무게감에 너무 괴로워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부족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 자체를 이쁘게 보실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