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라자로 마을에도 가을이 짙어지고 봄, 여름 내내 푸르던 나뭇잎들이 형형색색 예쁘게 물들었습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운 생명을 위한 밑거름이 되는 생명의 신비를 마을 전역에서 보며 우리 인생을 묵상하게 되는 ‘위령 성월’입니다.
오늘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인생을 사는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지 너무나 명확한 해답을 주셨습니다. 신부들은 새벽에 올지도 모르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등잔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잘 채워두고 깨어 기다려야 합니다. 신랑이 언제 방문하는지 정확히 안다면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지만, 문제는 신랑이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신랑과 함께 기쁜 혼인 잔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천상 등잔의 기름을 가득 채워놓고 깨어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위령 성월에, ‘언제 올지도 모르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깨어 기다려야 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는 바로,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우리는 항상 깨어 있는 마음으로 준비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우리 성 라자로 마을에 부임한 후 첫 번째로 주님 곁으로 보내드린 분은 안금옥 데레사 님이십니다. 봉성체를 해 드리기 위해 오산 요양병원에 계신 데레사 할머니를 처음 방문한 날, 저는 당시 105살이었던 고령의 할머니가 당연히 환자복을 입으시고 누워서 저를 맞이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정갈한 사복 차림으로 앉아서 손가락도 성치 못한 손목에 묵주를 감으신 채 저를 기다리셨습니다. 안내를 해주신 간호사가 설명하기를, 새로 부임한 마을 원장 신부가 성체를 모시고 온다는 말을 들으신 할머니는 ‘새 신부님이 주님을 모시고 오시는데 환자복을 입고 누워 기다릴 수는 없다.’라고 하시며 이른 아침부터 식사도 안 하신 채 일반복으로 갈아입혀달라고 부탁하고는 앉아서 기다리셨다는 것이었습니다.
16살 나이에 나병에 감염되신 데레사 할머니는 강제로 고향을 떠나 전국을 떠돌며 생활하시다가 성 라자로 마을로 들어오셨습니다. 데레사 할머니는 누가 봐도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는 서럽기만 한 삶을 사셨는데도, 제 손을 잡고 ‘주님께 감사하고, 방문해 주신 신부님, 수녀님에게 감사하고, 늘 정성껏 돌보아주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님에게 감사하다.’라고 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병자성사를 드리러 가서 뵌 데레사 할머니는 산소마스크를 착용하시고 가쁘게 숨을 쉬며 누워계셨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제가 성유를 발라 드리고 마지막 안수를 드리는 그 순간까지도 온 힘을 다해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데레사 할머니는 비록 그 누구보다 힘들고 고단한 일생을 사셨지만,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이 마련하신 천상잔치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글ㅣ한영기 바오로 신부(성 라자로 마을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