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래에서 저는 치매 노인 환자를 주로 보고 있습니다. 얼마 전 60대 초반 여자 환자가 자주 잊어버리는 증상으로 내원하셨습니다. 건망증 같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는데, 뇌 자기공명영상검사, 아밀로이드 양전자방출단층촬영, 신경심리평가 등을 통해 알츠하이머 치매 초기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본당 구역장으로 활동하실 만큼 외향적인 성격의 이 환자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에 우울해하시며, 약을 처방 받으러 오실 때마다 눈물짓곤 하셨습니다. 치매를 알리는 과정도 암을 알리는 과정처럼, 의사로서 마음이 힘듭니다. 노인들에게 있어 ‘기억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죽는 것만큼 큰 두려움이자 힘든 과정임을 자주 보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이렇듯 모두에게 소중합니다. 모든 환자가 누군가의 부모, 형제, 자녀, 친구로서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주변인들과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억이란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자 ‘나’를 정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억의 상실이 노인들께 큰 공포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감정이 깃든 기억은 더 강렬히 뇌에 남는다고 하지요. 예수님께서 수천 년에 걸쳐 우리의 머릿속에 기억되는 것은 아마도 사랑이라는 큰 감정 속에서 그분의 말씀이 공명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이 사랑이 깃든 기억의 힘을 진료 현장에서 자주 목격합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치매 환자인 아내를 산책을 시키며 살뜰히 돌보고 계신 할아버지부터, 요양원에 모신 치매 아버지 생각에 늘 가슴 아파하며 어머니와 함께 외래에 오셔서 상담받으시고 세세한 부분까지 놓칠세라 가슴 졸이는 아들 보호자까지, 이 모든 것은 환자가 기억을 잃기 전에 베풀었던 사랑 때문이겠지요.
미국 식약처 허가를 받은 ‘레케네맙’이라는 새로운 기전의 치매 치료제가 국내에도 곧 도입될 것 같습니다. 치매를 완치하고 정복하는 치료제라고는 할 수 없지만, 치매 환자에게 더 다양한 치료 방법을 소개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 의사로서 설렙니다. 그리고 단순히 치매라는 모호한 개념에서 치매를 여러 가지 생체표지자로 정의하고 병기를 결정하는 등 그 진단기준에도 획기적인 변화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들이 축적되면 언젠가는 치매를 정복하는 날이 오겠지요.
환자의 기억이 점점 희미해져가지만, 가족들의 기억은 그대로 보존되고 또 살아 있습니다. 환자를 닮은 딸, 아들, 손자, 손녀들이 자신들이 받았던 사랑을 기억하고 그 힘으로 살아가지요. 우리 신자들도 예수님의 기억을, 그분께서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주신 사랑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가족, 주변에게 전달하는 것은 어떨까요?
글ㅣ엄유현 레비나(가톨릭대학교 성빈센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