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을 읽기 전, 마태오 복음 14장의 끝부분을 먼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겐네사렛에서 기적을 일으키시고 티로와 시돈으로 이동하십니다. 겐네사렛은 갈릴래아 호수 북서쪽에 위치한 평원입니다. 이곳은 유대인들이 활동하던 지역이며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일으킨 곳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티로와 시돈은 상황이 달랐습니다. 티로와 시돈은 이스라엘 서쪽에 위치한 지중해 인근의 항구도시입니다. 이곳은 페니키아 지역으로 이민족들이 거주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민족들이 드나들었고, 온갖 향락이 일어나던 장소였습니다. 또한, 북이스라엘 아합 임금의 부인 이제벨이 이 지역 출신입니다. 이제벨이 혼인을 하며 이스라엘 땅에 바알과 아세라 여신, 몰록 신앙을 가져온 것을 떠올려보면, 겐네사렛과는 ‘장소의 의미’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지역에서 한 여인이 예수님에게 다가와 청을 합니다. 마귀 들린 자신의 딸을 치유해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라며 매몰찬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에게는 기쁜 소식이었고, 이민족들에게는 절망적인 이야기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만 구원을 내리시겠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인은 계속해서 청하였고, 예수님은 그들을 강아지로 비유하며 모욕적인 표현까지도 서슴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여인은 그런 예수님의 말씀에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라도 먹는다.’라고 표현하며 자신의 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합니다. 여인의 간절한 청에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유대인에게만 유보되어 있지 않으며, 믿음으로 간절히 청하면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신앙인이기 때문에 아무런 노력 없이도 당연히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누군가의 호의는 노력에 의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아무 의미 없는 호의를 베풀지는 않으십니다. 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전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의무를 소홀히 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의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사랑에 감사하며 우리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글ㅣ조윤호 윤호요셉 신부(봉담 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