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세상에 벌을 내리셨다. ‘노아의 방주’ 때처럼 세상에 많은 비가 내렸다. 윤호는 신실한 신앙인이었다. 비가 오기 시작할 때, 윤호는 기도를 했다. “하느님, 비를 거두어 주세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비를 거두지 않으셨다. 비는 점차 거세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집 안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그래서 윤호는 지붕 위로 올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물은 지붕 근처까지 차올랐다. 그때 윤호가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느님, 저를 구해주세요.” 그의 기도가 하느님께 닿았는지 하느님은 커다란 통나무 하나를 그에게 보내셨다. 하지만 윤호는 그 통나무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리고 또 기도했다. “하느님, 저를 구해주세요.” 하느님은 기도를 들어주셨다. 그래서 10명이 탄 8인승 보트를 그에게 보내셨다. 하지만 윤호는 자신의 자리가 없다며 그 보트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또 기도했다. “하느님, 저를 구해주세요.” 이제 물은 지붕을 덮을 만큼 찼다. 하느님께서는 또 기도를 들어주셨다. 그래서 구조헬기를 보내셨다. 하지만 윤호는 구조헬기를 타지 않았다. 이미 많은 사람이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여러 번 윤호의 기도를 들어주셨지만, 윤호는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들어주지 않은 하느님을 원망하며 하느님 곁으로 가게 되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하느님이 다가오심’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의탁했던 주인공은 자신에게 다가온 하느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받아들이는 자세’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원하고 기대하는 방법으로 다가오시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는 예상하지 못한 때와 방법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상에서 ‘하느님의 이끄심’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항상 하느님께 ‘시선’을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려고 해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 하느님의 활동입니다. 그런데 보려는 의지마저 없다면, 당연히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하느님이 어디 있냐’라며 대드는 실수를 하곤 합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가 상상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현실에서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하느님의 활동을 찾고 실존하는 그분의 다가오심을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다가오는 방법을 생각합시다. 내 것만 고집하다 보면 주시는 것마저도 받지 못합니다. 얼마나 많은 것을 받고 있는지 깨닫기 위해서는 수용적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글ㅣ조윤호 윤호요셉 신부(봉담 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