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야 다시 살아나는 신비
지난 2020년은 저에게 죽음에 대해 많이 묵상하게 했던 해였습니다. 1월에는 제 부친이, 7월에는 유학 시절 제 학위 논문지도를 해주셨던, 그곳 표현으로 “박사 아버지 신부님”이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두 분 모두 갑작스레 돌아가신지라 허망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나 가까운 지인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종종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죽음이라는 어마어마한 실재가 우리를 압도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상실감에 우리는 큰 슬픔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죽음은 그저 슬픔의 대상으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죽음으로 인해 할 말을 잃은 우리의 입이 다시 열려 하느님을 찬양하는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부활을 체험합니다. 바로 ‘세례성사’를 통해서입니다. 본래 세례예식은 요한 세례자가 요르단강에서 한 것처럼 몸 전체를 물에 담그고 나오는 방식입니다. 이는 ‘물속으로 들어가면서 지금까지의 나는 죽고, 물에서 나오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을 상징하며, 이 부활의 체험은 우리가 의식하든 못하든 우리의 신앙 안에 살아 있습니다.
지난 12월 4일에 교구 사제서품식이 있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극히 제한된 인원만 참석한 가운데 서품식이 이루어졌지만, 서품 미사의 은총은 조금도 덜하지 않았습니다. 서품식 중에 수품 후보자들이 바닥에 엎드리는 예식이 있습니다. 이 예식은 가장 낮은 자세로 봉사하겠다는 의미와 함께, 바닥에 엎드려 죽었다가 다시 사제로 태어난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신학교에서 1년 동안 함께 격리생활을 하며 동고동락했던 부제들이 사제로 태어나는 순간은 개인적으로 큰 감동이었습니다. 부제들이 바닥에서 일어나 안수를 받고 제의를 입은 후, 제단으로 올라갈 때, 오늘 복음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시는 예수님과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우리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긴 하지만, 환멸이나 절망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죽음이 있어야 부활도 있고, 부활을 통해서만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천 년 전 예수님에게도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의 두려움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당신의 구원사업을 끝까지 완수하실 수 있었던 것은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늘 함께하시고 구원해주시리라는 확신! 오늘 주님 세례 축일을 지내며 예수님의 이 확신이 우리의 믿음이 될 수 있도록 다짐합시다. 아울러 새로 태어난 사제들의 성화를 위해서도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글 | 박찬호 필립보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