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기찬 기도 생활의 첫걸음,
하느님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 수정 작업
열차 탑승 시간도 넉넉한데다 마침 배꼽시계의 알람소리가 연신 울리는 바람에 홀로 역내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점심시간이어서 그런지 자리마다 사람들로 빼곡했습니다. 쭈뼛거리는 저를 발견하신 사장님께서는 한 어르신 앞의 빈자리로 안내했습니다. 본의 아니게 생면부지의 어르신과 겸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어르신과 마주 앉아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 눈길을 피하며 설렁탕을 한 그릇 넘기는데, 세상에 그런 고통이 또 없었습니다. 너무나 어색했던 저는 훌훌 말아먹고 빨리 일어섰습니다. 5분 남짓한 시간이 그렇게 길고 지루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있으면 어떻습니까? 두세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시곗바늘이 좀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지상에서 천국을 맛보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앉는 시간, 다시 말해서 기도 시간도 그런 시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의외로 많은 분이 기도 시간을 지루해합니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지니고 있는 그릇된 하느님 상(像) 때문이 아닐까요?
활기찬 기도 생활의 첫걸음은 ‘하느님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를 수정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구약 시대 하느님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뵙는 사람은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에,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 모세조차도 그분 얼굴 뵙기를 꺼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니고 있었던 하느님 상(像) 역시 본질에서 많이 벗어나, 지나친 경외심과 두려움, 진노와 심판에 대한 이미지가 우세했습니다.
은혜롭게도 이 땅에 육화강생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오랜 세월 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하느님의 얼굴이 만천하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났습니다. 놀랍게도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얼굴을 지닌 분, 우리를 향한 자비와 연민으로 가득한 분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의 인생 안으로 들어오시겠답니다. 우리와 삶을 공유하시고, 우리의 슬픔을 당신의 슬픔으로 여기시고, 우리의 눈물을 당신의 눈물로 여기시겠답니다.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번 한 주간 이런 노력을 해보시면 어떨까요?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짧게라도 우리의 머릿속에 자상한 하느님의 얼굴을 떠올려보는 것입니다. 내 깊은 상처를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져주시는, 내 눈의 눈물을 손수 닦아주시는, 나를 꼭 끌어안고 토닥토닥 등 두드려주시는, 나를 위해 손수 커피를 내리시는, 나와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시는 그런 하느님의 모습을 말입니다.
산다는 것은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삶은 최고의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는 일입니다”(조지 케이소릴).
글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