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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나

작성자 : 홍보실 등록일 : 2023-03-17 11:35:54 조회수 : 378

성경에서 병은 하느님께 죄를 지은 결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병이 있는 이들과 가까이하지 않으려 합니다. 부정한 존재라고 여겼기 때문이죠.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태생 소경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했죠. ‘죄를 지을 기회가 없던 아이가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은 부모의 죄다.’

 

태생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눈을 뜨게 되죠. 예수님을 통해서 그의 죄든 부모의 죄든 용서받게 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치유된 소경은 안식일에 치유를 받은 것이나 죄를 사함의 권한이 하느님에게만 있는 것이란 생각과 자신이 죄를 용서받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합니다. 그저 보지 못하던 세상을 깨닫게 된 기쁨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달랐습니다. ‘왜 안식일에 치유했느냐? 어떻게 인간이 병을 치유할 수 있느냐?’라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병을 치유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죄의 용서는 하느님께 유보된 것인데, 알지도 못하는 웬 청년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어떻게든 흠을 찾으려 했던 것이죠. 그래서 그 이후에 기적을 체험한 사람에게도 찾아가고 앞을 볼 수 있게된 사람의 부모에게도 찾아가서 흠을 찾으려 노력합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눈앞에 있는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고 자신들에게 찾아온 구원의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제대로 보지 않았고’ ‘다른 곳을 보고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제대로 바라본 이는 눈이 떠지는 것과 더불어서 예수님의 제자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눈이 멀었다는 것은 영적인 눈이 감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잘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율법을 잘 준수하며 하느님의 뜻을 지키고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명이었던 율법은 조상들의 전통과 합해지며 그 의미가 퇴색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든다면, 하느님께서는 하얀색 물감을 주셨지만, 유다인들은 그 물감에 조금씩 다양한 색을 섞었고 온갖 색이 섞인 색을 하얗다고 믿고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세상은 눈에 보이는 우물 크기가 전부입니다. 벼룩은 자신의 몸의 100배를 뛸 수 있지만, 닫힌 병에 들어가게 되면 병의 높이만큼만 뛸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잘 보고 있다고 고백하며 살아가지만, 정말로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나에게 다가온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여전히 어둠 속에서 잘 보고 있다라고 여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글ㅣ조윤호 윤호요셉 신부(봉담 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