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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을 맞아 찾는 일상의 의미

작성자 : 홍보실 등록일 : 2023-03-03 09:32:18 조회수 : 495

어김없이 또 사순 시기가 돌아왔습니다. 전 어릴 적 3~4월이 되면 찬란한 봄날이 왔음에도 늘 무거운 성가와 슬픔이 묻어나는 미사 분위기가 왠지 싫었습니다. 고통은 누구나 싫으니까요. 제 진료실에는 오늘도 마음의 고통, 이로 인한 불안을 안고 환자분들이 오십니다. 고통의 크기도 기간도 시작된 시간도 제각기입니다. 하지만 그 많은 환자 중 그 고통을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온전히 살고계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을 보며 전 예수님께서 보여주고자 하신 고통의 의미를 묵상하게 됩니다.

 

중증장애인 아들을 30년 넘게 사랑으로 돌보고 계시는 한 부부가 있습니다. 이 부부는 아들의 불편을 걸음걸이와 눈빛만 봐도 알아채고 보살피고 계시지요. 그분들에게 꾸준한 일상과 감사는 고통을 견뎌내는 중요한 원동력이 됩니다. 일도 놓지 않고 누구보다 열심히 하시고 정기적으로 아이와 성지를 찾으시기도 하시지요. 한 조현병 환자는 열심히 복약하며 누구보다 성실히 일하시고 여행과 결혼 생활 등 주어진 모든 일상을 살고 계십니다. 그저 그렇게 묵묵히 주어진 하루를요.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어떻게 보면 지루하고 따분한 일상이 고통을 안고 온전히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있게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신자로서 우린 같은 성가를 부르고 같은 기도를 읊조리고 같은 형식의 미사를 수년, 수십 년 반복하지요. 그 반복 속에 분심도 들고 공상에 빠지기도 하고 때로는 신심이 옅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고통의 순간 우리는 바로 그 반복했던 기도를 찾고 미사를 찾으며 위안을 얻습니다. 혼란이 오고 마음이 무너질 때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다시 우뚝 설 수 있게 하는 것은 그 단조롭고 익숙한 일상 속 꾸준한 신앙생활입니다.

 

저는 주어진 하루에 그저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환자들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고통을 피하고 원망하고 좌절하기보다 받아들이고 순종합니다. 부활을 기다리는 사순 시기,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고자 하신 고통의 의미를 묵상하며 동시에 지금 여기, 오늘, 내게 주어진 그 일상의 소중함을 묵상해 봅니다.


글ㅣ엄유현 레비나(가톨릭대학교 성빈센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