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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탄생(창세기 1)

작성자 : 관리자 등록일 : 2020-12-31 16:13:23 조회수 : 789


새로운 탄생(창세기 1)


창세기는 신화설화 중 하나라 합니다. 역사서나 지혜서보다 과학의 시선으로 볼 때 불편해지는 이유일 수 있습니다. 19세기까지 성경의 신화적 서술을 문자 그대로 믿기도 했지만, 이제는 포용적인 교계의 태도 덕분에 성경에 대한 다양한 재해석이 가능해졌습니다. 물론 신앙이나 종교를 억지로 과학의 틀로 환원시켜 함부로 재단하는 것 역시 과학주의라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 입니다. 실험과 통계로 철저히 논증해도 다시 새로운 가설이 등장하면 과거 이론의 맹점이 또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종교나 과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좀 더 객관적으로 자신의 작업을 겸허하게 보고, 혹시라도 경직된 시각을 가진 건 아닐까 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글은 더더구나 연구라기보다는 주관적인 짧은 단상에 불과한 것이지, 학문적 해석이나 주석은 아니라는 점을 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밝혀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성경의 첫 부분입니다. 담담하지만, 속이 뻥 뚫리는 시작입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한글 번역의 “한 처음”이란 말의 울림은 같은 뜻의 히브리어 베레시스(bereshith בְּרֵאשִׁית)나 그리스어의 지네시오스(genesios γενέσεως)의 어감과는 다르게, 시원하게 부는 바람 같습니다. 아마 맑은 후음인 ‘한’과 맑은 치음인 ‘처’의 어감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듯 혼돈과 어두움 속에서 새로운 것이 만들어질 때의 상쾌한 기분이 듭니다. 대단한 것들이 새로 생기는 것만 창조는 아닙니다. 삶의 새로운 전기가 시작될 때, 우리는 항상 새롭게 다시 만들어집니다. 


한데, 창조의 과정은 항상 낡은 자신과의 이별과 파괴를 전제하게 됩니다. 산다는 것이 본래 언제 무슨 지뢰가 터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하지만, 좌절할 때는 터널의 끝이 안 보입니다. 고생했던 과거 중 쓸모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던 듯도 합니다. 일에 실패하고, 관계에 상처받으면 세상과의 관계를 끊고 싶어질 수도 있습니다. 너무나 암담해서,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나란 존재가 아예 이 세상에 없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 ‘어차피 죽을 거 왜 이 고생을 하지’ 와 같은 무섭게 무거운 생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마음의 병이 깊어지면 술, 마약, 도박, 폭력적 행동, 자살 기도 같은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합니다. 이래도 저래도 다시 제자리일 때면 정신과 의사를 찾아 항우울제를 먹고 상담을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럴 때 공통으로 품어 보는 희망이 “다시 태어나고 싶다.” 혹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고 싶다.” 가 아닐까 싶습니다. 쉽게 말해 “삶의 대변혁, 재창조” 입니다. 물론 그런 구호로 삶, 그 자체가 단번에 바뀌지는 않습니다. 내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으나 버릴 것, 부술 것, 정리할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한 집착은 강고하고, 타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도덕 의지는 미숙하고, 습관에 절은 몸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일종의 어두움이자 혼돈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의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와 비슷합니다.


도대체 나의 의지로는 회복할 수 없는 순간이 그렇게 영원처럼 계속될 것 같다가도, 어떤 계기가 되면 거짓말같이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누군가 상의할 사람을 찾아 힘든 고비를 넘기기도 하고, 나를 사랑하고 돌봐준 누군가에 대한 책임감이 불현듯 생각나서일 수도 있고, 갑자기 자기 자신이 어린 아이처럼 보이는 “어른으로의 변신”이 되는 순간도 있습니다. 인생의 귀인으로부터 그분이 겪은 고통과 극복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혜의 귀퉁이를 만질 수 없는 처지이자 상황이라면,  창세기 1장 3절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라는 구절에 기대,  하느님께서 내게 무슨 말을 하고 계시는지 들어 보면 어떨까요.


“하느님은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라는 다음 대목은 분별의 마음을 가지라는 주문 같습니다. 자신의 태도 중 어떤 것은 자신에게 이롭게 작용하고 어떤 것은 해롭게 작용하는 것인지 알아채라는 명령입니다.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고, 성찰해 보라는 뜻입니다. 실패의 경험은 성숙을 가르쳐 주는 좋은 코치입니다. 성공의 기쁨은 종종 다른 고난으로 이어지므로, 좌절한 기억이 겸손과 신중함으로 바뀌면 풍요로운 마음 밭의 거름이 됩니다.  

그런 방식으로 어둠과 빛이 우리에게 모두 필요하다는 것, 다 아는 진실이지만 고통이 거듭 찾아올 때는 ‘왜 내게는 행복을 주지 않느냐’ 투정부리고 싶습니다. 신심 깊은 욥도 그랬는데요. 우리는 아픔 앞에서 모두 어리석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자신의 한계와 무지를 인정하고 고백할 때에야 절대자(하느님)를 만나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어두움에서 빛이 생기는 첫 장면. 막히고 부서지고 힘들 때 우리가 떠올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나미 리드비나(이나미심리분석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