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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들을 기억하며

작성자 : 홍보실 등록일 : 2022-09-16 09:14:56 조회수 : 567

가을로 접어든 9, 우리는 순교자 성월을 지내고 있습니다. 순교자 성월은 천주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한국 순교성인들과 함께 아직 성인품에 오르지 못한 모든 순교자를 기리며, 그들의 신앙을 본받아 순교 정신을 닮기 위해 노력하는 거룩한 달입니다.

 

제가 지내고 있는 이곳 죽산 성지는 병인박해 시기 용인, 양지, 그리고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 등지의 천주교 신자들이 압송되어 죽음을 맞이한 순교 터입니다. 그나마 행적이 알려진 스물 다섯분의 순교자 외에도 이름 모를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신앙과 얼이 깃든 거룩한 장소입니다. 조선의 국법상 한 가족을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처형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부와 가족이 함께 순교한 순교 터이기도 합니다. 이 같은 정황과 당시 신앙 선조들의 하루 일상에 대한 기록으로 유추해 볼 때, 순교자들은 대단히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항상 하느님과 함께 일상을 살아갔음을 되새기게 됩니다. 인간적으로 두렵고, 견디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묵묵히 신앙을 지켰던 것입니다. 일상 안에서 매 순간 성경을 필사하고,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묵상한 것을 삶으로 얼마나 진지하게 실천했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시, 순교자들의 삶에 사변적 요소보다는 실천적이고, 수덕(修德)적인 요소가 많이 발견되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오랜 세월 전, 순교자들은 홀로 고독 속에서 돌아가신 주님의 모습에서 깊은 영적인 슬픔과 동시에 진리와 희망을 발견했고, 주님의 부활 사건에 대한 관상과 묵상 속에서 하느님의 진리와 십자가의 거룩한 어리석음이 결국 세상을 이겼다는 확신과 기쁨을 굳건히 가졌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코로나 상황이 조금 나아졌던 지난 5, 많은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 내용의 대부분은 성지에 장미가 이제 폈나요?”였습니다. 장미가 피는 시기에 맞추어 엄청나게 많은 질문과 관심 그리고 순례와 방문이 증가함을 체험하며, 이곳이 순교 성지인지, 장미 성지인지 헷갈릴 정도였습니다. 솔직히 많은 순례에 너무도 감사하고 행복한 동시에 가슴 한편에서는 무언가 아쉽고 씁쓸한 마음도 공존했었던 것 같습니다.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삶의 진리로 믿었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깊이 사랑하신다는 그 사랑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삶으로 진지하고 성실하게 살아갔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예수님과 그 가르침을 소중한 추억으로 체험한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 전달되었고, 전달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전해질 것입니다.

 

순교자 성월, 단순한 의례적 기념을 넘어 순교자들의 삶과 기억 안에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나시기를 희망합니다.


글ㅣ이해윤 루도비코 신부(죽산 성지 전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