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이 알든 모르든
본당행사에 거액의 후원금을 기부했다가 이런저런 구설수에 시달렸던 A씨는 이제 사소한 ‘선행’조차도 조심스럽다고 합니다. “처음엔 억울했는데 돌이켜보니 틀린 말도 아니더군요. 그 후로는 뭘 하려고 하면 제 ‘의도’가 의심스러워서 아무 일도 못하겠어요.”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한 번쯤은 해보셨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좋은 삶(Good Life)을 꿈꾸며 보다 선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인정받고 싶은 소박한(?) 욕심과 하릴없이 드러나는 이기적 본성으로 인해, 매순간 본성적 나약함을 절감하며 걸어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간적 한계를 너무나 잘알고 있기 때문일까요? 우리는 타인이 행하는 좋은 일을 순수하게 바라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서울대학교 행복연구센터의 최인철 교수는 ‘좋은 일에 대한 지향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심리가 이타적 행위를 행하는데 미치는 영향’에 관해 흥미로운 연구를 했습니다.
우선 다음의 문항을 제시하고 순수 이타성에 대한 이상적 기준을 측정합니다. ① 타인을 돕는 행위를 통해 실질적인 이익을 보는 경우는 이타적이라고 할 수 없다. ②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 남을 돕는 행위는 결코 이타적이라고 할 수 없다. ③ 타인을 도와주지 않을 때 느낄 죄책감을 피하기 위해서 남을 돕는 행위는 결코 이타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다음, 선행의 사례를 보여주고 그가 얼마나 이타적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위의 세지 질문에 동의한 사람일수록 그의 이타성을 낮게 평가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어쩌면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마태 6,3) 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누구보다 깊이 공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순수 이타성의 기준이 높은 사람들은 더 많은 이타적 행위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을까요? 흥미롭게도 순수 이타성에 대한 이상적 기준이 높을수록 기부나 자원봉사 등의 이타적 행위를 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지나치게 높은 이상적 기준은 남들을 폄하할 뿐만 아니라, 주인이 맡긴 달란트를 땅에 숨겨두었던 사람처럼(마태 25,14-30 참조) 자기 자신조차도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시킨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선행의 모든 지향이 순수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선행을 가장해 자기 욕심을 채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을 좋은 것으로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나없이 불완전성을 지니고 있기에 ‘완전히 순수한 지향’을 지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이타적 행위가 되고 자신에게도 이득이 되는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이타성’ 마저도 인정하는 것이 우리 안의 이타성을 확장시키는 길”이라는 최인철 교수의 지적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고 여겨집니다. 왼손이 알든 모르든 자선은 자선이지 않겠습니까?
배기선 영덕막달레나 수녀
(성바오로딸수도회, 심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