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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을 위한 ‘포기’의 영성

작성자 : 홍보실 등록일 : 2022-07-15 09:08:49 조회수 : 679

언제부터인가 포기하는 편이 마음 편하고 욕심을 비우는 것이 마음 뿌듯하게 느껴집니다. 원래 저의 성향이 악착같이 경쟁하고 어떻게든 이루어내는 승부욕을 드러내기보다는, 적당한 정도에서 자신을 스스로 달래 멈추는 편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못내 아쉬움을 삭히지 못하곤 했는데 언제부터인가는 그런 아쉬움도 남지 않습니다. 완전히 없어졌다면 거짓말이고, 그런 나 자신의 아쉬움 때문에 스스로 힘들어지는 일이 예전보다 많이 줄어든 것은 분명합니다.

 

인생의 과정 전체를 보면 열심히, 무턱대고, 무모할 정도로 앞만 보고 달릴 때가 있습니다. 뭔가를 모아들이고 쌓는데 몰두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그 시기는 응당 그렇게 해야 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이런저런 변화를 겪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나면 다시 내 안에 쌓아놓은 것들을 하나하나 비우고 포기하는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물론 마지막 임종의 순간까지도 꽉 틀어쥐고 놓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현세 삶의 논리에서 보면 포기는 대표적인 부정적 가치입니다. 많은 사람이 읽는 자기계발서 부류의 책들에서도 죽어도 포기하지 마라’, ‘포기하지 않으면 못할 것이 없다등 포기는 극복해야 할 대상임을 나타냅니다. 물론 성취가 절실한 시기에는 포기할 줄 모르는 부단한 노력이 중요합니다. 성공을 위한 지속적인 의지를 굳건하게 다지기 위해서도 포기를 경계 대상으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마가 언제나 그리고 모든 상황에 절대 가치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포기가 미덕일 수 있는 상황, 포기가 필요한 시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포기가 필요한 시기는 어느 때일까요? 왜 포기가 필요할까요?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세상일이 점점 녹록지 않고 틀어지는 일이 많아진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줄곧 여러 일을 무난하게 처리해왔는데, 언제부터인가 일이 여의치 않습니다. 처음에는 왜 예전처럼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지 수긍할 수 없어 발끈합니다. 좌절과 침체에 반발하면서 한층 투지를 북돋아봅니다.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번 절대 포기하지 않아!’를 외치면서 분발해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다릅니다. 분명 전처럼 다시 일어나 달려들었지만 오래가지 않아 또다시 일이 틀어집니다. 이런 경험이 몇 번 반복되면 현대 사회의 생존 조건이 더욱 각박하고 치열하게 느껴집니다. 세상살이에 관한 생각과 마음가짐 역시 예전 같지 않아집니다. 한창때는 세상과 삶에 대한 열정적인 자신감이 충만했는데, 이제는 사는 게 참 내 맘 같지 않네를 읊조리게 됩니다.

 

언뜻 심각한 시련의 시기로 판단하고 포기하지마의 투지를 한층 불태워야 할 것 같은 이러한 경험은 사실 삶의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의 단초입니다. 이 시기에 계속해서 밀어붙이며 치달을 것이지 아니면 잠시 멈추어 나 자신과 세상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을 것인지, 결정적 갈림길입니다. 줄곧 해오던 일이 예전 같지 않고 세상과 삶이 새삼 내 맘 같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 지금의 나에 대한 전반적 재점검이 필요하다는 신호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방식과 세상을 대했던 태도에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요구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포기입니다. 침체와 좌절이 닥쳤을 때 나를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고 지금까지의 나에게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포기하지마는 이러한 인정을 어렵게 만드는 치명적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이제껏 고수해왔던 방식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인정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이 무너지고 패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절대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밀어붙이곤 합니다. 하지만 이때야말로 진정한 포기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고수해왔던 방식, 내가 세워놓은 틀을 되돌아보며 포기해야 할 것은 포기해야 할 때입니다. 이때의 포기는 결코 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포기의 순간 새로운 지평, 더 넓은 삶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위에서 말한 포기는 삶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효율적 선택과 집중으로서의 포기입니다. 물론 이런 의미에서의 포기 역시 우리 삶에 중요한 성찰 주제입니다. 하지만 포기라는 주제는 단지 이런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좀 더 근원적이고 내면적 차원의 포기에까지 우리 성찰을 심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현세 삶에서 일의 효율성을 높이고 원활히 성공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포기에 국한하지 않고, 아예 현세 삶에 대한 가치판단 자체를 뒤바꾸는 의미에서의 포기까지를 우리 성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렇게 심화된 포기는 결국 나 자신 안에서의 포기에 해당합니다. 나의 내면 안에서 근본적 변화를 이루는 포기를 뜻합니다. 이제껏 나를 구성하고 있던 모든 것들, 나 스스로 확신했던 나의 능력과 가치, 나의 목표, 가치관, 세계관, 삶의 의미 등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을 정도까지의 포기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뿌리부터의 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포기는 종교적 깨달음의 차원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닙니다. 동서양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나 자신 안에서의 포기에 해당하는 자기 비움에 초점을 맞춥니다. 나 중심적인 아집과 틀을 완전히 해체시킬 때 절대적인 자유와 완성을 얻는다는 것이 모든 종교의 공통된 가르침입니다. 완전한 의미에서의 포기는 자기 비움의 종교적 가르침 안에서 본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현대를 영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현대인이 지나치게 합리성과 물질적 가치를 우선하는 삶을 추구하면서 여러 한계 상황을 맞이하였고, 이로 인한 내면적 결핍과 혼란을 해결하려고 다시 종교적 영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에게 진정 필요한 영성은 어떤 것일까요? 현대인의 내면적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결국 앞에서 이야기한 나 자신 안에서의 포기’, ‘자기 비움이지 않을까요?

 

글ㅣ오지섭 사도요한(서강대 종교학과 대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