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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달리타스(Synodalitas)에서 협치(協治)를 배우라!

작성자 : 홍보실 등록일 : 2022-07-08 09:06:22 조회수 : 803

2022년을 정신없이 달려와 반환점을 돌고 보니 20대 대통령선거에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까지, 직업상 올 한 해의 절반을 정치권의 빅 이벤트로 떠들썩하게 보낸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차마 받아들일 수 없는 선거 결과를 두고 긴긴 후유증에 시달리기도 하신다는데요. 하지만 경쟁의 시간은 지나갔고 이제는 협치의 시간입니다. 국민에게는 둘로 갈라져 반목을 거듭했던 분노를 거둘 시간이며, 위정자들에게는 그런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협치해야 하는 시간인 것이지요.

 

협치’(協治)의 사전적 의미는 서로 힘을 합쳐서 잘 다스려 나간다라는 뜻으로, ‘무언가를 결정하기에 앞서 협의와 공감대 조성을 선행한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무언가를 이루어가는 과정에 중점을 둔다는 점에서 의견이나 주장이 서로 맞아서 일치하는 결과에 중점을 둔 합치(合致)와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게 쓰인다고도 하고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좁은 정치적 의미로서의 협치는 여당과 야당이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협력하며 국민을 위한 주요 현안들을 처리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하지만 좀 더 넓은 의미로는, 지역사회에서 국제사회에 이르기까지 여러 공공조직의 업무를 총괄하기 위해 정치, 경제, 행정적 권한을 행사하는 국정 관리체계 전반을 의미하기도 한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모든 정책 시스템을 혼자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 함께 의제를 만들고 정책을 완성시켜 나간다는 거지요.

 

그러고 보니 문득 떠오르는 낱말이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우리 가톨릭교회의 화두가 되는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가 그것입니다. 주교 회의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 식별을 위해 모든 하느님 백성이 친교 안에서 함께 참여하고 경청하며 논의하는 여정의 구조와 정신을 담고있는 것이 바로 시노달리타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공동합의성이라는 말로 번역해서 쓰기도 했지만 공동합의성, 공동 식별 여정, 함께 가기 등등의 단어로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 여정이라는 시노달리타스의 핵심 의미를 충분히 담을 수 없어 라틴어 발음 그대로 그냥 시노달리타스로 사용하기로 했답니다.

그런데 우리 정치에서의 협치를 돌아보면 소통, 협력, 국민통합을 위한다는 그럴싸한 명분으로 야합일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정치권이 보여준 협치의 작동방식이란 것이 여당의 주장에 반대하는 야당에 어떤 보상을 주고, 야당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고받는, 일종의 교환행위였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 과정엔 당사자들에게 중요한 명분이라는 게 따르기도 하지만, 그 그럴싸한 명분의 협치가 과연 국민을 위한 협치였느냐 하는 점은 다시 생각해볼 일입니다. 단순히 외형적 협치가 아닌, 갈라졌던 국민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협치였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지난 5월 말, 한국천주교회의 네 번째 추기경으로 서임된 유흥식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은 가톨릭평화방송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국민통합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통합은 상대방 처지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결코 이뤄지지 않습니다. 또 다른 면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복음 말씀에서 보면 주는 삶을 살 때 통합이 이뤄집니다. 사회에서 특별히 지도층에 있는 분들이 어려운 분들과 나눔의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인디언 속담 중에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오랫동안 걸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고 하지요. 지난 대선을 통해 여당은 야당이 되었고 야당은 여당이 되었으니 서로의 신발은 바꿔 신은 셈입니다. 여당의 묵직한 책임감도, 야당의 예리한 견제력도 새롭게 배우고 익히며 국민통합을 위한 협치로 나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할 때인 거지요. 그리고 주는 삶’, ‘나눔의 삶은 유흥식 추기경의 말처럼 지도층에 있는 분들’, 곧 권력을 가진 사람이 먼저 내어주고 나누어야 협치의 길이 보일 겁니다. 더 높은 자리에서,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 먼저 그리고 기꺼이 양보하려는 마음은 없으면서 상대방에게 화해를 요구하고 협치를 요구하는 것은 또 다른 협박이며 폭력일 뿐일 겁니다. 더 높은 자리에서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사람 즉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 그리고 그 권력을 나누어 가진 여당이 협치를 위해 통 큰 리더십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통 큰 리더십이 협치를 이룰 수 있는 친교의 장을 마련해야 할 테고요.

 

시노달리타스를 실현하는 교회는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지,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귀 기울여야 한다’(시노달리타스, 최현순, 바오로딸 2022)고 합니다. 위정자들이 가톨릭교회의 시노달리타스에서 진정한 협치를 배우면 좋겠습니다.

 

글ㅣ이지혜 체칠리아(전 CPBC 시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