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소서 성령님! 새로운 언어를 불어 넣으시고 생명의 말들을 주시어, 우리가 아름답지만 말하지 못하고 과거로 가득하지만, 미래가 없는 ‘박물관 교회’가 되지 않게 지켜주소서!” 2021년 10월, 프란치스코 교종이 세계주교대위원회(세계주교시노드) 개막 연설에서 하셨던 말씀입니다. 오순절 다락방의 뜨거운 체험 후 유다인들과 모든 예루살렘 주민들을 향해 성령이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함을 확인하는 연설을 했던 사도 베드로의 모습과 겹칩니다. 시노드 기간 중에 맞는 성령 강림 대축일의 의미가 그래서 더 새롭습니다.
온 교회가 서로 만나 경청하고 교회의 오늘과 내일을 식별하는 시노드를 열며,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번 시노드의 주인공이 성령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시노드의 주제어는 친교와 참여와 사명입니다. 무엇을 결정하는 회의라기보다 시노드를 계기로 모든 신자가 한 몸이 되어 교회를 체험하고 교회의 역할과 사명에 대해 함께 식별하는 시간을 만들고자 하는 교종의 뜻이 주제어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시노드 개막 이후 7개월, 우리는 어디쯤 와 있을까요? 2022년 6월 현재, 제가 살고 있는 미국의 상황을 본다면 그다지 낙관적이지는 않습니다. 아메리카 매거진(America: the Jesuit Review)의 한 칼럼은 시노드에 대한 신자들의 관심이 기대에 비해 크게 부족하다고 말합니다(Joshua Whitfield, SJ, “Not many Catholics care about the synod. But I’m not ready to give up on it yet”).
많은 본당이 아직도 팬데믹의 영향 속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것이 직접적인 이유가 될 수 있겠지요. 대부분 대면 모임으로 돌아섰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참석률이 저조하고, 온라인으로 많은 일을 해결하다 보니 생각을 나누고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식별을 위해 필요한 정보들이 전 연령층의 신자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으며, 참여를 격려하는 공식적인 초청이 이루어지지 않아 언제 어떻게 의견을 밝힐 수 있는지 파악하기 힘들다는 점도 상황을 더 곤란하게 만들고 있고요. 그러나 이 모든 곤궁함을 그저 팬데믹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요? 위 칼럼의 저자는 근본적인 문제가 따로 있다고 지적하며, 교회의 대화 능력 상실에 그 이유를 두고 있습니다. 대화를 통해 경청하고 의견을 조정하는 능력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단지 교회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전반적인 징후이긴 하지만, 교회의 경우 위계적인 구조와 관습 때문에 이 징후가 더욱 고착화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교회에서 의결이 이루어지고 진행되는 방식은 종종 몇 사람들에 의해 독점되어 그 외의 신자들은 자유롭게 의견을 밝힐 동기조차 못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과적으로 다양한 의견이 들어설 자리는 없어지고, 무조건 “예.” 라고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만 남게 됩니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함께 고민해야 할 커다란 문제에 직면할수록 이러한 문제점은 더 고질적으로 드러나지요. 비판과 성찰을 요구하는 이들이 오히려 비난과 따돌림을 받으며 상처를 입곤 합니다. 대화와 식별은 사라지고 침묵과 두려움만 남게 되지요. 팬데믹보다 더 큰 도전은 바로 이 침묵과 두려움의 문화입니다. 시노드의 목적인 “경청하고 함께 식별하는 과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침묵과 두려움의 문화를 만들어낸 상처에 대한 치유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시노드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이대로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시노드가 어떤 변화를 불러올지는 우리 자신과 우리 각자가 속한 본당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행전 2장의 본문은 귀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오순절 다락방에 모인 이들은 하나 같이 상처받은 이들이었습니다. 스승을 살해한 국가권력에 상처받고, 서로에 대한 불신과 배신에 상처받고, 디아스포라 떠돌이로서 경험한 모욕과 괄시에 상처받은 이들이 두려움에 떨며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성령이 내렸습니다. ‘불처럼 갈라진 방언’들이 나타나, 마치 혀와 같이 각 사람 위에 머물렀지요. 이 뜨거운 기운 속에서 사람들은 두려움을 떨치고 각기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사도 2,3-4).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8절의 장면입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언어로 자기들 말을 할 뿐 아니라, 서로서로의 말을 자신의 말로 듣고(ἤκουον)있습니다(사도 2,8). 상처받은 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말로 털어놓기 시작하는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마치 본인의 말인 것처럼 듣고 이해하며 소통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오순절의 성령체험은 모두가 말을 하게 된 체험일 뿐 아니라, 서로의 말을 듣게 된 체험이기도 했습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먼 시노드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오순절의 체험이 아닐까요? 다락방의 제자들이 체험한 것처럼, 성령이 우리에게 주는 힘은 서로의 상처를 솔직하게 드러내며 말을 꺼내게 할 뿐 아니라, 상대의 말을 나의 말로, 상대의 상처를 나의 상처로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루카는 이 오순절 체험을 일회성의 사건으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흩어져 있던 신자들이 서로의 체험에 신뢰를 가지며 서서히 한 몸 교회가 되어 가는 존재 양식의 변화가 오순절에 시작된 것입니다. 시노드 이후의 교회 또한 이러한 존재 양식의 변화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글ㅣ조민아 마리아(조지타운 대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