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저는 동료 신부님들과 바다를 보러 갔습니다. 해안을 걷다가, 제법 높은 물살과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질하고 있는 해녀들을 보고는 멈추어 서서 제가 말했습니다. “와, 추울 텐데…” 그러자 곁에 있던 동료가 저에게 나긋하게 말했습니다. “사실 바닷물 속은 아직 따듯해. 계절이 다가오는 속도가 다르거든….”
‘코로나 비대면’이라는 겨울이 지나면서, 우리는 보상 같은 만남과 회식 등으로 급히 동면에서 깨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갑작스러움은 굼뜬 우리에게 ‘포스트 코로나’, ‘뉴노멀’, ‘메타버스’, ‘초연결 사회’다 하면서 새로운 ‘블루오션’에 어서 적응하라고 재촉합니다. 하지만 바다의 온도가 서서히 바뀌듯, 우리가 품어온 온도도 그렇지 않을까요? 세상은 이미 추위가 가셨다고 봄을 외치고 있지만, 바다가 그렇듯 어쩌면 우리의 속도는 그것과 다를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느 속도에 맞춰야 할지, 또 무엇에 기대야 할지를 환기시켜 주시듯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니라, 저의 마음마저 살피시는 당신의 인격에서 나오는 평화를 전해주고자 하십니다. 여기에는 기다림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부활하신 그분을 맞이하는데 사흘이란 시간이 필요했듯, 또 그분의 성령을 맞이하는데도 기다림이 필요했듯 그분께서는 세상의 급격함과는 다른 원천인 평화의 성령을 내어주고자 하십니다. “보호자, 성령께서…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실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6-27).
‘평화의 성령!’ 말씀의 온기를 기억하고 사랑하라는 초대입니다. 바로 주님은 ‘성체 성사’에서 우리의 영혼을 데워주시고자 당신의 따듯한 몸과 숨결을 내어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생명의 빵으로 사랑의 여정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여정의 걸음에 알맞은 속도는 우리를 재촉하는 세상의 속도가 아니라, 인격적 만남으로 우리에게 살과 성령을 내어주시는 그분 마음의 속도가 아닐까요?
글ㅣ나형성 요한 세례자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