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은 우리에게 익숙했던 여러 가지를 변화시켰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여행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갖가지 목적으로 여행을 자주 갔었는데,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되면서 급격하게 여행 기회가 줄어들었습니다.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을 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여행의 의미와 고마움이 새삼 절실해집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는 순례에 대한 아쉬움이 크게 느껴집니다. 조만간 다시 편안하게 순례에 나설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순례의 종교적 의미를 성찰해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순례’라는 말은 꽤 익숙합니다. 종교 성지와 연관되지 않더라도 뭔가 의미심장한 여정을 말할 때 순례라는 표현을 흔히 사용합니다. 인생의 과정을 순례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순례라는 말이 일반화한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그래도 종교에서 연원한 의미가 근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순례의 종교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대표적인 내용 몇 가지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순례의 종교적 의미는 ‘공간의 성화(聖化)’라는 개념과 연관됩니다. 이 내용에 관해서는 현대의 대표적 종교학자 중 한 사람인 멀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가 잘 설명해주었습니다. 엘리아데는 인간의 종교경험이 지니는 핵심적 의미를 성현(聖顯)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바로 ‘성스러움이 드러난다’는 의미입니다. 속(俗)의 차원에 속한 인간이 성스러움을 체험하는 것은 성스러움 스스로가 속의 차원 안으로 모습을 나타내면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는 이미 너무 익숙한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 성현입니다.
성현 현상이 일어남으로써 속의 차원에 질적인 변화가 생깁니다. 이러한 변화는 특히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간의 종교경험으로 이어집니다. 성스러움을 체험한 시간과 공간은 주변의 속과는 다른 성스러운 시간과 공간으로 질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당은 다른 공간과 구별되는 성스러운 공간이고, 기도와 전례의 시간은 일상의 시간과 다른 의미를 지니는 성스러운 시간입니다. 성지(聖地)는 이렇게 성화된 공간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가장 근원적인 성현 현상이 일어난 공간이 성지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둘째, 순례에서 추구하는 것은 ‘근원적 의미로 회귀(回歸)’입니다. 종교적 인간이 성지를 순례하고자 하는 것은 그 성스러운 공간에 깃들여 있는 근원적 성현의 의미로 되돌아가기 위함입니다. 종교적 인간은 근원적 성현 체험 이후 끊임없이 성현 체험을 반복하려는 열망을 지닙니다. 근원적 성현 체험 안에서 인간과 세상의 궁극적인 의미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반복적인 성현 체험은 종교의례와 기도 등의 일상적 종교 실천을 통해서도 이루어지지만, 특별히 성지 순례는 근원적 성스러움의 공간을 직접 찾아가는 행위라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셋째, 순례는 ‘신앙’의 의미를 온전히 드러냅니다. ‘신앙’의 의미에 관해서는 또 한 사람의 저명한 종교학자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가 잘 설명해주었습니다. 스미스는 신앙의 의미를 ‘초월적 진리를 향한 전인격적 응답[헌신]’으로 설명합니다. 마치 깜깜한 밤바다에서 엉뚱한 방향을 향하던 배가 항구의 등대 빛을 확인하고 그 이후로는 오로지 등대를 향해 방향을 설정해놓은 상태와 같습니다. 여기에서 신앙의 두 가지 중요한 요소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방향 전환’입니다. 등대 빛을 발견하기 이전까지 엉뚱한 방향으로 놓여 있던 배의 방향타를 등대를 향한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즉, 신앙은 삶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초월적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 전혀 다른 존재로 뒤바뀜을 의미합니다.
신앙의 다른 요소 하나는 ‘지속적인 진행’입니다. 등대 빛을 발견하고 등대를 향해 방향을 전환했다 해도 그저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등대에 가까이 도달하기 위한 항해를 지속해서 진행해야 합니다. 초월적 진리를 머리로만 알고 말로만 되뇌는데 그치는 것은 진정한 신앙의 의미일 수 없습니다. 신앙은 나의 삶과 존재가 끊임없이 초월적 진리에 가까워지려는 진행형의 의미를 지닙니다. 성스러운 의미가 깃들여 있는 성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순례는 초월적 진리를 향한 지속적 추구라는 신앙의 의미를 온전히 드러내줍니다.
이러한 순례의 종교적 의미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려 합니다. 이십여 년 전 미국의 어느 대학에 방문 연구원 자격으로 머물던 때의 일입니다. 그곳 연구소에서 인도인 한 명을 만났는데, 그는 무슬림이었습니다. 이슬람에서는 이슬람력으로 12월에 전 세계의 무슬림들이 그들의 성지인 메카로 순례 여행을 떠납니다. 그 인도인도 마침 그해의 순례 행사에 참여할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를 감동시켰던 것은 그가 순례 여행을 위해 일 년 동안 조금씩 돈을 모으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그렇게 돈을 조금씩 모아야 했을 수도 있지만, 그 말을 들으면서 저는 순례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순례의 의미를 충실히 실현하는 것은 단순히 목적지에 도달함 자체보다는 그곳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월적 진리에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려는 신앙의 의미가 순례의 과정 전체에서 온전히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 인도인이 일 년 동안 한 푼 두 푼 돈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이미 그는 순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셈입니다. 요즘 일부 성지 순례가 그저 장소에만 초점을 맞춘 관광 여행과 다를 바 없어진 것에 비추어 성찰해볼 의미인 것 같습니다.
글ㅣ오지섭 사도요한(서강대 종교학과 대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