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는 이 말씀을 제자들은 어떤 마음으로 들었을까요? 매일 듣던 말이라, 무덤덤했을까요? 그러나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본다면, 늘 새롭게 느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2005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선종과 2009년 김수환 추기경님 선종 때의 마지막 인사는 결코 우리에게 진부하지 않았죠. 그 흔한 “행복합니다, 행복하세요.”,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말이 새롭고도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진정 ‘서로 사랑’(요한 13,35) 안에서 살았고, 그것이 우리에게 ‘살아있는 언어’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나에게 이 ‘서로 사랑’ 안에 사는게 무엇인지를 물어본다면, 그 대답은 참 다양하지 않을까 합니다: ‘내 의지와 목숨을 다하는 것,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는 것, 희사하는 것, 관심과 배려와 대화로 화합의 길을 찾는 것’, 또 어떤 이는 “사실 어느 종교든, 무신론자든 서로 다투지 않고 사랑하는게 중요하지, 세례나 미사나 아무렴 어때요?”라며 관대함(?)을 드러낼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어떻게 대답할까요? 사실 그들이 전한 ‘서로 사랑’에는 무엇보다 먼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요한 13,34)이라는 말씀이 전제되어 있죠. 그리고 이 사랑의 원천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요한 13,32 참고)임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곧, 그들의 ‘서로 사랑’은 영광의 빛을 품은 하느님의 언어로 시작됩니다. 성경에서 ‘영광’이란 어떤 위대함을 표현하는 수단을 넘어, 관계의 특성이 담긴 매우 신적인 내용으로 드러납니다. 우선적으로 하느님을 향해있고, 동시에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에게 묶어주시는 사랑의 표현으로 나타나기도 하죠. 특별히 신약성경에서는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신비를 통해 인간에게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옷을 입혀주시는 바로 그 영광입니다. 곧, 영광이란 ‘구원의 가치’가 담긴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참된 영광이고, 이 영광이 사랑의 참된 가능성이 되어줍니다. 사도들도 이를 통해서 ‘서로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경우 우리는, 내 중심적 능력에만 시선을 두게 됩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내 안에 그럴 힘이 있을까? 못하면 어떻게 하지? 내가 용서할 수 있을까?” 물론 분명히 우리에게도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 가능함 자체도 먼저 주님의 선물이지요. 세상은 하느님에게 어디 내려와 보라며 그 능력을 조롱하지만, 그 사랑은 끝내 그 억압과 교만의 휘장조차 반으로 가르며 구원 가능함의 길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의 모범이 아니라, ‘서로 사랑’을 가능케 하시는 구원자로서 당신을 입혀주고자 하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성찬의 자리에서 이 영광을 입는 현재를 체험합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랑을 입고, 우리도 ‘서로를 위한 사랑’에 열려진 몸으로 불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주님 부활의 몸을 통해, 일상의 우리 또한 ‘너’를 억누르지 않는 사랑을 하며 살아계신 하느님의 언어가 되어간다면, 깊어지는 성모성월 흔치 않은 오늘이 될 것입니다.
글ㅣ나형성 요한 세례자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