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8). 오늘 나는 내 손에서 무얼 지키려고 합니까? 내 안위, 체면, 재산이 중심에 있나요? 성소도 그런 것일까요?
1999년 저는 “예수님을 닮은 사목자가 되고 싶습니다.”라며 신학교라는 뜰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본당에 선배 신학생이 없었던 터라, 마치 절로 들어가는 것으로 혼자 상상하며 출가정신의 홀로된 결연함을 품고 갔습니다. 그랬던 그 젊은이는 신학교 ‘못자리’에서 부대끼면서 농부이신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하고, 점차 자기 능력과 의지, 깨달음만으로 예수님을 닮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성소는 마치 신앙의 ‘짝꿍’ 같아서 내 결연한 신념 지키기가 아니라, 무엇보다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신앙의 몸짓입니다. 특히나 사제 성소는 착한 목자의 말씀을 잘 듣는 양 같은 신앙이 먼저 있어야, 온유한 사목자가 될 수 있겠지요. 또 그래야 그의 몸짓에 잃은 양을 찾는 마음이 묻어있고, 주님의 양들이 다가와 점차 양 냄새나는 사목자로 성장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목자로 형성되는 과정에서 부르심의 주체이신 하느님과 응답의 주인공인 자신과 함께, 참 중요한 것은 바로 공동체의 돌봄입니다. 저도 공동체의 자리에서 여러분처럼 많은 착한 목자들을 만났고, 여전히 만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사제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귀한 원천’에 닿아있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몸이 된 만남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가장 깊은 위로’임을 몸에 새겨준 엄마와의 포옹, 새벽 4시부터 촛불을 밝히시던 할머니의 기도와 그 손을 잡고 성당으로 가던 복사단 새벽길, 중고등부 주일학교에서 친구들과 큰 목소리로 웃음 가득히 성가를 부르던 자유로움, 사제 성소의 꿈을 물어봐 주시던 교우님들, 신학원에서 함께 별을 보던 동기의 미소, 오늘도 예수님의 마음을 들려주는 동료 사제, 그리고 소중한 이들이 귀한 손으로 기억해주는 마음이 묵주 알알이 내려와 저에게는 살아있는 착한 목자와의 만남이 됩니다. 이 공동체의 사건은 세월이 지나면 저에게서 멀어지는 그 ‘무엇’이 아니라, 마치 새로 뿌려지는 비와 볕처럼 여전히 제 가슴 위로 지나가고 생동하는 그 ‘누구’가 됩니다. 이것이 성소에 서로의 돌봄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저는 지금 제 안에 빛나는 그 모든 돌봄이 놀랍게도 성체 성사의 축복과 이어져 있음을 느낍니다. 매일 성찬의 자리에서 참 사제직의 실현도 참 사도직의 파견도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이를 곰곰이 되새김이 부족했다는 사실에 다시금 놀라는 것은 저만이 아니겠지요.
포스트 코로나 시대라고 성체 성사의 뜰이 그 힘과 향기를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오늘 다시 여기에서부터 우리가 돌봄을 배우고, 홀로된 양을 찾아 그들을 이 생명의 뜰로 부를 때입니다. 이 초원에서 ‘착한 목자’의 손길 덕분에, 돌봄의 사건이 계속 생동하는 사랑의 몸이 되어, 주님의 양들을 지키는 일이 우리들 모두의 성소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글 | 나형성 요한 세례자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