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알자스 지방의 운터린덴 박물관에는 이젠하임 제단화(Isenheim Altarpiece)라고 이름 붙여진 장엄한 예술 작품이 있습니다. 독일 출신의 조각가 니콜라스 하그노버(Nikolaus Haguenaur)와 화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ünewald, 1470-1528)가 공동 작업하여 완성한 이 제단화의 백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묘사한 그뤼네발트의 목판 유채화지요. 이젠하임이라는 작은 마을의 성 안토니오 수도원 병원에 있었던 그림을 옮겨 놓은 것인데, 이 병원은 중세시대 소외된 병자들을 치료하는 것을 소명으로 여겼던 수도사들이 설립한 병원이었다고 해요. 그중에서도 맥각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 특히 많았다고 하는데, 이 병은 호밀, 보리 등에서 발생하는 곰팡이 균으로 인해 오염된 빵을 먹었을 때 감염되는 병으로 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협하던 질병입니다. 영양이 결핍되어 면역력이 떨어진 데다 썩은 빵까지 먹은 환자를 공격해 그의 피부를 먼저 손상시킨 후, 곪은 상처를 통해 안으로 파고들어 혈관과 신경을 파괴하고 고열과 경련, 환각 등을 일으키다 결국 죽음으로 몰고 간다고 합니다.
그뤼네발트는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그리스도를 묘사하며 앙상하고 쇠약해 보이는 그분의 몸에 맥각병으로 보이는 상처들을 그려 넣었습니다. 당시로 보면 십 수세기 전의 십자가 사건을 재해석하여 그리스도의 고통과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유비시킨 창의적이고 도발적인 시도였지요. 수도원 병원으로부터 위촉받은 작업을 하며, 그 병원에서 맥각병으로 죽어가던 환자들이 자신들이 겪는 고통을 함께 느끼며 죽어가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며 위로받고 희망을 찾기 바랐던 예술가의 간절한 마음이 그림 안에 담겨있습니다. 그뤼네발트는 죽어가는 그리스도 옆에 세례자 요한 또한 그려 넣었습니다. 요한은 뼈만 남은 손가락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고, 그의 옆에는 라틴어로 성서 한 구절이 적혀 있습니다. “illum oportet crescere me autem minui. 그분께서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고통을 짊어지고 죄인의 모습으로 한없이 작아진 그리스도 옆에서, 썩은 빵을 먹고 죽어가는 환자들 옆에서, 그뤼네발트의 요한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오늘 성경 본문의 예수님은 낮아지고 작아지라는 이 복음의 말씀을 몸소 드러내고 계십니다. 이른 아침 성전에서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고 있는 그의 앞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들이닥칩니다. 간음현장에서 발각된 두 사람 중 여인만을 잡아끌고 온 걸 보면 이들은 국법인 모세의 율법에 따라 죄를 묻고 처형하는 절차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듯 보입니다.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고 제거하려는 게 그들의 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머릿속엔 성마른 말들이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하든 반박할 논리가 준비되어 있었겠지요. 그가 여인의 공개처형을 반대하면 위법자로 몰아세우고, 반대로 공개처형을 찬성한다면 위선자로 몰아세우려 했겠지요. 그들은 말을 칼과 창으로 사용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을 봅시다. 여인은 말을 박탈당했습니다. 간음현장에서 붙잡혔을 때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 상대 남성과는 달리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에겐 자신의 입장을 표현하고 항변할 말이 허락되지 않았지요. 발언이 허락되지도 않았거니와,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한다고 한들 말과 글의 전문가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설복할 수 없었을 터이지요. 이 여인은 사랑을 선포한다고 알려져 있는 예수님에게조차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 또한 말의 힘으로 살아가는 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요. 언어는 그 자체로도 권력입니다. 힘 있는 자들의 질서로 세밀하게 직조되어 있는 상징체계지요. 간음이라 이름 붙은 현장에서 홀로 죄를 뒤집어쓰고 끌려와 수많은 남성들에 둘러싸여 손가락질당하고 있는 이 이름 모를 여성,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녀의 말을 들어줄 이 또한 옆에 세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이 말을 박탈당한 여인을 앞에 두고 당신의 말을 포기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뿐 아니라 예수님도 언어에 탁월한 분이지요. 그분은 독특한 화법과 율법 해석으로 전통주의자들의 허를 찌르고, 쉽고도 수려한 비유로 하느님 나라를 그리던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을 빼앗긴 여인 앞에서 함께 말을 내려놓고, 대신 몸을 굽혀 여인의 침묵에 동참합니다. 그가 손가락으로 땅에 쓴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복음서 기자가 관심 있었던 것은 그가 땅에 쓴 글귀가 아니라, 낮아지고 작아진 그의 몸짓과 침묵이었던 것 같습니다.
침묵을 강요당한 여인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분은 말을 빼앗긴 여인의 대변자가 되기에 앞서 우선 여인과 같은 처지가 되어 낮아지고 작아지길 자처하여 여인의 존재를 대신 드러낸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앞에서 여인을 항변하며 아무리 정교하고 웅장한 말로 맞서 본들, 정작 말을 빼앗긴 여인의 존재는 더 작아질 뿐이겠지요. 오고 갈 말의 내용뿐 아니라 그 말의 형태 속에 더 날카롭게 쏟아져 나올 공격성, 상대방의 말을 부수기 위해 내 말의 칼날을 갈아야 하는 논쟁의 순리, 그 가운데 끊임없이 대상화되어 더 작아지고 더 비참해질 여인 앞에서 예수님은 말을 버림으로써, 말을 빼앗긴 이와 침묵으로 연대함으로써 언어 권력자들의 논리를 끊어 버리고 그들의 질서를 흔들어 버린 것입니다.
말과 문자가 범람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온라인ㆍ오프라인으로 내뱉어진 말들은 주인 없이 떠돌며 거칠고 날카로워져 의심과 불신을 피워 올리고,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저마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과 합리성과 당위성을 내세우며 끊임없는 제 주장을 펼치는 그 말의 주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부끄러움’이란, 혹은 ‘책임감’이란 양심의 소리를 이미 들을 수 없게 되어버린 듯 보입니다. 자신의 말에 묻혀 들을 귀를 잃어버린 것이겠지요.
때로 침묵으로 소통하시는 하느님을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길은 침묵입니다. 우리가 말을 내려놓을 때, 스스로 작아질 때, 비로소 당신의 존재를 비워 조용하고 여린 생명의 소리와 고통의 소리를 듣게 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글 | 조민아 마리아(조지타운 대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