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 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이 그런 거지 나만 힘들겠냐, 그래 봐야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남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 되지 않듯 나의 고통도 남의 고통과 교환되지 않으니까요. 우린 너나 할 거 없이 이기적인 인간이라 기쁨도 고통도 온전히 내 안에 고여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타인을 사랑하는 일, 그러니까 나와 가족을 제외한 남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압니다.
그런데 신약에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문장이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하고, 거슬러 올라가면 구약(레위 19,18)에서도 발견됩니다. 그러니까 이웃 사랑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란 말인데, 문제는 과연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할 수 없다면 지킬 수 없는 계명이란 얘긴데, 대체 왜 이렇게 성경은 이웃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걸까요? 적당히 선행을 베풀어라, 웬만하면 친절하게 대해라, 이 정도가 딱 괜찮은데 말입니다.
게다가 우린 ‘나 자신’도 어떻게 사랑해야 제대로 사랑하는 건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이래저래 ‘사랑’이란 말은 우리에게 공염불 같고, 그림의 떡 같고, 유토피아의 깃발 같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우리 가까이에 두려고, 모든 관심을 사랑으로 이해하고 증오마저 무관심보단 낫다고 하며 사랑의 범주에 넣습니다. 질투는 사랑이 지나쳐서고 시기는 자기애의 발로이며 증오는 사랑이 지쳐서입니다. 맙소사!
부모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녀를 통제할 때 자녀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합니다. 또한 타인을 내 잣대로 사랑하면서 상대가 고마움을 모른다고 불평합니다. 위선도 선이라면 인간이 가진 감정의 모든 동력이 사랑이겠죠. 그렇게 우린 괴물이 되어갑니다. “임대아파트 사는 애랑 놀지 마, 왜? 우리 애는 소중하니까! 공부 못하는 애랑 어울리지 마, 왜? 우리 애는 소중하니까!” 그런가요? 우리 아이만 소중한 그 마음이 진짜 사랑일까요?
우리는 서로의 위선을 이해하고 포장해주며 살고 있습니다. ‘원래 시작은 선했을 거야, 세상이 흉하고 구조가 나쁜 거지.’ ‘인지상정 몰라? 기존 권위에 대립한 예수님이 이상한 거야, 감히 성전 매대를 뒤집다니 죽음을 자초했지.’ 그러면서 우리는 위선을 보고 위선이라 말을 못 합니다. 그러다 미움받고 외톨이가 되기 싫으니까요. 그러다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으니까요. 골고타의 그 십자가는 너무 아픈 사랑이라 그것이 사랑처럼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종종 오해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는 사랑은 너무 아픈 사랑이기에 이기적인 인간에게는 오해받기 쉬운 것입니다.
글 | 방영미 데레사(한국가톨릭 문화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