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바란 것도 없는데, 그 크지 않은 바람마저 뜻대로 안 되는 게 인생입니다. 그래서겠죠, 저의 기도는 반복되고 장황합니다. 성경에는 분명 “기도할 때에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7-8)라고 써 있지만, 이상하게도 제 기도는 직통이 아닌가 봅니다. 꼭 누군가가 저의 기도만 하느님 앞에 배송되지 못하도록 반려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 기도를 못 들으셨나?’라는 의심도 듭니다.
그런데 간절하게 무언가를 바라는 기도를 할 때의 나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몸이 경직되고 마음은 조급하죠. 두 손을 꽉 쥐고 머릿속에선 형광등이 번쩍입니다. 목숨을 걸고 싸우러 전장에 나가는 군인처럼 결기에 가득 차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전쟁터이고 온통 주변이 적으로 둘러싸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일상을 비장미가 흐르는 비극으로 인식하죠. 막상 나는 희극의 주인공처럼 실수와 오류투성이의 허당인데, 나 혼자만 영웅 서사의 비극을 찍고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 나의 기도가 이루어지기라도 한다면 나는 그대로 영웅 심리에 도취되겠죠. ‘나 정도면 괜찮지, 내가 화낼 땐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내가 그 정도의 깜냥은 되잖아?’ 왜냐면 나는 하느님이란 어마어마한 인맥을 잡은 사람이니까요. 우주 최강의 지존이 나의 후견인?! 그렇다면 뭐가 아쉬워서 자신을 돌아보겠습니까? 성찰에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는 데는 그만한 용기와 고통이 수반되는데요.
그래서 놀랍게도 우리는 나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오히려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이게 참 신비하죠? 나 자신과 부딪혀서 도망가지 않을 용기가, 내가 넘어지고 깨져서 전의를 상실했을 때, 거기다 해법이라곤 간절한 기도밖에 없는데 그 기도마저 어디로 사라지는지 모를 때, 그래서 낮아지고 싶어서 낮아진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낮아졌을 때, 바로 그 지점에서 다시 출발선에 서게 되면, 비로소 나는 어깨에 힘을 빼고 눈에 힘을 풀고 세상을 보게 됩니다.
죽을 때까지 나는 미숙한 사람이겠지만, 그래도 매 순간 과거의 자신을 용서하고 새롭게 말랑해진 나와 만나는 것, 이것이 기도의 힘 아닐까요? 내가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사는 것, 그렇게 죽다 살아나서 부활의 기쁨을 느끼는 것, 그것이 어깨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 같습니다.
글 | 방영미 데레사(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