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22년 하고도 2월입니다. 할 일은 많고 마음 급한 한국인의 시간이라 그런지 빨라도 너무 빠릅니다. 물론 지구가 공전을 멈추지 않는 한 1년은 365일일 거고, 자전을 멈추지 않는 한 1일은 24시간이겠지만, 자전 따위 무시하고 싶어도 해가 지고 해가 뜹니다. 공전 따위 무시하고 싶어도 육체가 노화되고 부실해집니다. 아무리 내가 나라고 주장해 봤자 시공의 영향을 받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 완전히 자유로워질 순 없습니다. 이처럼 내 삶이 수동적인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마음껏 먹어서 비만해질 자유? 마음껏 도박이나 게임에 빠질 자유? 마음껏 괴롭거나 우울해질 자유? 내 의지로 선택한 상황이 아닌데, 개선의 의지를 버리는 것도 내 맘이니까 그것도 나의 자유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자유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은 자유로운가요? 신앙인은 비신앙인보다 금기도 많고 그만큼 자기통제도 더 강합니다. 그래서 더욱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나를 잘 모르면 나는 외적 조건에 순응하게 됩니다. 그래야 내가 덜 다치고 덜 상처받으니까요. 물론 그렇게 해서 내가 평안하다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건 내게 맞는 선택이니까요. 그런데 나와 맞지 않는 선택을 했다면 나는 자유롭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작은 일에도 짜증이 나고,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감이 치솟고, 타인의 행복에 공감보단 시기심이 앞서고, 남의 불행과 비교해야 비로소 내 삶에 안도감이 든다면, 그런 내가 진짜 ‘나’일 리 없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나는 지금 이대로 괜찮은가?’ 그러면 내 안의 무언가가 나에게 하는 말이 들릴 것입니다.
요한 묵시록에는 ‘귀 있는 자는 들어라’라는 구절이 7번 반복되는데, 이 말은 공관복음에서도 여러 번 등장합니다. 듣는 것,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내 안의 소리를 듣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더더욱 많습니다. 그러니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는 생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우린 신앙인입니다. 이 말은 즉 내 안에 성전이 있고, 그 성전 안에 성령이 있으니, 나에게 찬찬히 물어본 뒤 시간을 들여 잘 듣기만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쉽고도 좋은 방법인가요! 그러니 잘 들어봅시다. 내 안의 영이 나를 누구라고 말하는지, 내가 진짜 원하는 걸 알려주는지…. 다만 ‘귀 있는 자’만 들을 수 있으니 나의 귀를 내 심장의 주파수에 맞추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혹시 내가 지금 괴롭다면, 또는 슬프거나
외롭다면 두려워 말고 넘어진 김에 쉬어 갑시다.
내 안의 성전 문을 활짝 열면, 단지 그러기만 하면 내 영이 나에게 자유의 열쇠를 건네줄 것입니다.
글 | 방영미 데레사(한국가톨릭 문화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