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에 공감할 수 없어서 평소 텔레비전을 즐겨보지 않지만, 가끔 채널을 돌리다 보면 제 마음속에 있는 ‘공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프로그램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반려견과 함께 살아가기 위하여 주인에게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이나 문제 아이를 둔 부모의 고민을 들어주는 프로그램입니다.
두 프로그램을 보면서 공통으로 느끼는 것은 ‘우리가 상대를 안다고 생각하며 지내지만, 생각보다 상대를 잘 모르면서 안다고 착각하며 살아간다는 것’과, ‘상대의 표현이나 목소리에 관심을 갖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보다, 내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평가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두 프로그램에서 의뢰인은 소위 ‘문제가 있어 보이는 대상’을 바라보며 ‘상대의 문제’를 제기하지만, 정작 문제는 의뢰인 당사자에게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불편한 사이가 되어버린 사랑의 대상. 이 불편한 관계의 해결은 대부분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고 상대와 ‘공감’하는 것을 바탕으로 시작됩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바라보며 늘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그분에게 문제가 있다며 지적하는 부류들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죠. 그런데 그들이 불편해하는 원인, 문제의 시작은 바로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던 ‘우리 동네 아무개, 요셉의 아들’이라는 고착된 시선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을 불편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니 예수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을 공감하지 못했고 그분의 가르침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했던 예수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사랑의 찬가’를 노래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시금 묻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갈망하는 그 사랑을 우리는 얼마나 공감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우리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얘기하고 고백하지만, 왜 ‘하느님의 사랑’을 보편적으로 실천하지 못할까요? 왜 내가 불편하다고 느끼는 사람, 내 마음에 상처를 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힘들어할까요?
만일 누군가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상대를 바라보고 있는 나의 마음을 먼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상대에게 문제가 있다고 여기며 단죄하고, 판단하고 있는 나를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문을 여는 열쇠는 대부분 나에게 있습니다.
상대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상대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면, 하느님 사랑의 완성으로 가는 길이
조금 더 넓게 보일 것입니다.
글 | 김태완 바오로 신부(제1대리구 복음화2국장)